가마니 있으면 가마니로 본다
아주 오랜만에 글을 쓴다.
누군가는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 줄 알지만, 사실 나 스스로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던 20~30대 시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그 상처가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나에게 꽂히던 시간을 경험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 젊은 시절을 보낸지라 30대 후반 즈음에 접어들 무렵에는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졌다.
천성이 그다지 모질지 못한 나는 누군가 특히 회사에서 센 상사가 한 말이 비수에 꽂히는 경험을 몇 번 하게 된다. 그때마다 이를 간 것 같다. 상대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을,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 거라고, 말로 싸우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자고 더 다짐을 했었다.
최근 몇 년간은 마음에 쌓이는 일이 진급 관련 이슈였다. 억울하고 내가 억울한 것 온 천하가 다 아는데 답이 없으니 잊으려고 수없이 노력해도 마음에 앙금이 쌓였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키를 가지고 있는 팀장과 이에 대해 속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팀장이 여유 없이 바쁘게 보였고, 몇 번 말하려고 했는데 전화로 이야기하자느니 하며 업무처럼 '핵심만 간단히' 스타일로 접근하려는 모습에 실망했었다.
진급에 누락된 사유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직접 들은 적도 없었다. 물론 주변 선배들이 어쩔 수 없는 누락 사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지만,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므로. 하지만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서운했던 것은 팀장이 직접 나에게 TO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연차가 더 높은 사람 우선으로 승진을 시켰고 그 과정에서 서운했을 거란 공감이었다. 그리고 고생 많았으니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는 위로였다.
누군가는 팀장이 그런 사유를 구구절절 나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서운했다. 나를 가깝게 두고 일을 한 조직책임자들이 단물만 쏙 빼먹고 정작 부하직원의 서운한 마음을 그냥 당연하다는 듯 넘겨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서운했다.
연초에 진급 발표가 난 직후에는 정말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눈떠서 회사 가는 것조차 괴로워서 급 휴가를 내고 제주도로 일주일을 떠났었다. 돌아오고 나서는 훌훌 털어버려야 함을 알기 때문에 팀장과 그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놓쳤다. 다만 팀장 위의 상무께서 이런저런 이유로 밥 한번 사주셨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22년도 6개월이 지났고 7월이 되었다. 팀장과 상반기 면담을 할 시간이 되었다. 일대일로 이야기 나누게 된 것도 6개월 만이었다. 내 마음 한편에는 늘 진급에 대한 상처 혹은 억울함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애써 밝은 척 팀장과 면담을 나눴다. 이런저런 요즘 업무 상황에 대한 것들과 팀장이 HR 상 확인해야 할 것만 짚고 마무리되었다.
나는 팀장이 먼저 내 진급에 대해 지금이라도 한 번쯤 이야기해주길 바랬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하기에 나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짧은 면담이 알맹이 없이 거죽만 훑고 지난 간 느낌이었고 나는 후회를 넘어 한이 쌓일 것만 같았다. 이렇게 답답하게 하반기를 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고민 후 팀장에게 카톡을 보냈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못한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시간 내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팀장님은 뭐 급한 거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회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전화로 이야기하자고 했다. 나는 얼굴 보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어렵게 다시 한 일주일이 흘러 정말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면담 전에 무슨 말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정작 한 이야기는 내가 지급은 2년째 누락했기 때문에 올해 한번 더 누락하게 되면 답이 없는 상황이란 것을 다시 한번 인지시켰다. 팀장은 잘 알고 있고, 억울하게 2번 누락된 것에 대해 안타깝다고 표현했다.
그냥 공감을 받은 것을 넘어서 다시 한번 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나를 이런저런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미루지 말아 달라'라고 했다. 첫 번째 누락이었을 때는 기분은 나빴지만, 여태껏 진급 누락 없이 한 번에 척척 되었고, 책임쯤이야 너무 빨리 달면 빨리 회사를 나가야 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코로나 시절 2년을 최고 바쁜 업무를 하면서도 버텨냈는데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허탈감이 크다고 말했다. 내 청춘을 바쳐 14년을 일한 곳에서 인정을 못 받고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느낌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올해 진급 대상자를 팀장님과 이야기하며 다시 손꼽아 세어보았다. 남자 두 명 그리고 나, 또 새롭게 후배 선임도 이번 연도 진급 대상자에 해당한다고 했다. 나는 "팀장님, 저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루지 말아 주세요."라고 호소했다. 정말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참았다고 버텼다고, 그저 열심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 알아서 알아주고 대우해주겠지라는 믿음이 다 깨졌다는 것을 그 한마디로 표현했다. 나, 양보할 만큼 했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 말을 하면서 코로나 시대라 마스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눈물과 콧물이 정말 얼굴을 볼썽사납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면담을 하기 전에는 감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감정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떠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울게 되면 울면서라도 할 이야기 다 하자고 마음먹었었다. 그렇게 내가 할 말을 처음으로 팀장에게 다 했다.
면담이 끝나고 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어떻게 업무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 딴에 이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훗날 이 날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모르겠지만, 팀장은 나에게 말했다. 어려웠을 텐데 속마음을 말해줘서 고맙고, 하반기에는 진급 발표 3개월 전, 2개월 전 더 많이 상의하고 상황을 지켜보자고 했다. 그리고 나를 진급 고려대상 최우선 순위로 두겠다고도 말했다.
누군가는 그냥 쉽게 말해버릴 수도 있는 그 내 속에 있는 말을 나는 하지 못해서 너무 많이 속을 앓았다. 그리고 겨우 입 밖으로 꺼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오는 아주 큰 일을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