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낯선 여행지의 식당에선 기꺼이 메뉴판 아래쪽에 있는 메뉴를 선택해 보라'고 말한다. 메뉴판 윗쪽에 있는 메뉴라면 그 식당과 주방장이 자신 있는 대표 메뉴라 맛은 어느 정도 보장 되겠지만, 어떤 것인지 정확히 모를 음식을 골라 실패할 경우에도 쓸만한 에피소드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행에선 뜻밖의 상황을 많이 마주하며, 어디선가 모험을 감수할 용기가 샘솟는다. 대부분은 그렇지 않으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날 도리가 없기 때문일테지만. 괌은 내가 처음으로 운전한 해외 여행지다. 가이드북을 쓰기 위한 취재 막바지에 혼자 있게 되었는데, 차가 아니면 가야만 하는 식당에 갈 방법이 없었다. 물론 택시를 타도 되지만 비용이나 시간적 측면에서 렌터카를 운전하는 게 효율적이었다. 하필 나에게 주어진 렌터카는 대형 SUV. 괌에서 운전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행 전 몇 주간 동생과 도로 연수를 하긴 했지만, SUV는 또 다른 문제였다. 한국에서 몰았던 차와 달리 후방 카메라도 없었다. 길도 낯선데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에라 모르겠다' 싶어 운전대를 잡았다.
과연 듣던 대로 괌의 널찍한 도로는 초보 운전자도 운전하기 수월했고, 현지 운전자들도 클락션 한 번 울리지 않을 만큼 느긋해 마음이 편안했다. '아 그래도 할 만 하네' 생각이 들 때쯤 문제가 발생했다. 일방통행길에 반대로 잘못 들어갔는데 1차선이라 차를 돌릴만한 곳이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만한 건물 입구 뿐이었다. 건물 대문은 닫혀 있었고 도로쪽으로 난 짧은 길 양쪽에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기둥 비슷한 것이 세워져 있었다. 머리를 빠르게 굴려봤지만 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그 길로 후진해 들어가 차를 반대쪽으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후방 카메라도 없으니 각을 잘못 계산했다간 기둥에 차를 박을수도, 차 한쪽 면을 긁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설상가상으로 반대쪽에서 차가 진입하려고 하고 있었다. 물러설 곳이 없어 또 한 번 눈을 질끈감고 온 감각에 신경을 곤두 세운채 폭풍 후진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그 큰 차가 기둥 사이로 쏙 들어간 것이다. 어디 하나 긁히지 않고. 순간 눈물이 찔끔날 정도로 안심이 됐다. '내가 해냈구나' 그렇게 기쁠수가 없었다.
4년 후 운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 번 더 마주했다. 다행히 이번엔 혼자가 아닌 둘이었지만 일본은 운전자석과 도로 진행 방향이 반대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또 렌터카가 아니면 이동이 영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예약했던 렌터카를 인도 받고 운전석에 앉자 한숨부터 나왔다. 호기롭게 먼저 운전하겠다고 나섰지만 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가이드북에 써 있는 '운전시 주의사항' 몇 번이고 읽었지만 브레이크에서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몇 시간 같은 몇 분이 흐르고 친구와 깊은 심호흡 후에 겨우 전진 기어를 넣었다. '좌우가 반대, 좌우가 반대' 코너를 돌 때마다 우린 구호를 외치며 목적지를 향했다. 며칠간의 여행을 마치던 날, 우리와 렌터카는 무사했다.
그때 느낀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근 몇 년간 내 자신이 그렇게 기특했던 적이 없었다고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안 될 거 같다고 생각할수록 한없이 커져만간 불안과 두려움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스스로가 부풀린 허상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막은 건 내 자신뿐이었다. 그걸 깨달은 순간 힘이 풀렸다. 나도 무엇이든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왜 안 된다고만 생각했을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기에 한국으로 돌아와선 다시 소심한 쫄보 모드가 켜졌지만, 문득 오키나와 여행을 떠올릴 때면 왠지 모를 뿌듯함에 미소짓는다. 여행의 순기능이란 자신감을 충전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