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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와르 Sep 09. 2024

누군가를 안다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

류시화-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얼마만큼 아는 것을 의미할까? '안다'처럼 정반대의 말과 같은 의미인 단어가 또 있을까? 가까운 관계라 해도 어떤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잃어 간다.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향하는 방향만 볼 뿐, 그가 어떤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깨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요즘 여러모로 인간관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최근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수많은 일들에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이 정신없는 시간들을 보내다가

결국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인간관계였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은 절망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노력하고 아등바등 관계를 이어나가려 해도 결국에는 끝이 나고야마는 것을 볼 때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그냥 이렇게 지키고 떠나보내고를 매번 겪어야 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에게 마음을 주기까지 오래 걸리는 만큼이나, 그리고 온 진심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려 하는 나는, 이별이 너무나도 힘들다.

인연의 끝에서 항상 나를 탓하며 나의 사소한 잘못들을 끄집어내어 곱씹어본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것이 인간관계라는 것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온 마음으로 지켜내고, 관계가 끝이 나면 크나큰 상실감을 느끼는 나는 사실 크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냥 나를 나 그대로 봐주는 것.

나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알아주는 것’.


따뜻한 나, 정이 많은 나, 착한 나, 진심을 전하는 나, 위로하고 걱정하는 나, 함께 웃고 우는 나,

반면에 차가운 나, 착하지 않은 나, 웃지 않는 나, 어리석은 나, 나약한 나, 가면을 쓴 나,

이 모든 모습이 나다.


나 또한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내가 갖는 편견과 선입견이 있다.

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될 때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때로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습들 때문에 상대방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런 모습이 싫다면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게 대화를 이끌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만나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다.

일단 편견을 가진 나를 다스리고,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도 맞지 않으면 서서히 멀어져도 늦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의 어떤 모습이 사실은 가면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가면을 쓴 모습뿐이었다 해도 그의 본질을 몰라봤을 리는 없다고 나는 당당하게 확언할 수 있다.

본질 자체가 다른 결이었다면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인생을 운전하는 버스 기사라고.

나의 버스에 타는 승객들은 나의 시절인연들이고,

승객들이 타고 내릴 때마다 기사가 딱히 즐거워하고 슬퍼하지 않듯

나도 그런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끝내야 한다고 말이다.


나도 더이상 인간관계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이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위에 올린 책의 내용처럼,

나의 버스에 타는 사람들이 부디 편견 없이 나를 바라보고 나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주길,

나의 알맹이를 알아봐 주고,

나라는 사람을 사랑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적어도 나는 내 버스에 탄 사람들과 길고 긴 여정을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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