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민 Apr 21. 2024

쥐색은 가고, 귀리색이 왔다.

231105

 영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오랜 시간 함께한 물건들을 떠내 보내는 때가 종종 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약 5년 간 나와 함께해 준 쥐색의 긴 가디건. 주변 사람들에게 "넌 가디건이 그거밖에 없냐."라며 핀잔을 받아도 마냥 좋고 편했던 그 소중한 친구를, 여행 도중 깜빡한 모양이다. 날이 추워지고, 슬슬 새로운 가디건을 사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로.


 롯데월드몰의 H&M, 여성복 매장. 잘못 들어왔지만 구경이라도 해볼까 싶어 둘러보던 도중 첫눈에 반했다. 친구와 점심으로 카레를 배부르게 먹고, 친구는 신발을 사고, 나는 바지를 좀 샀다. 마무리가 될 때쯤. 나는 친구에게 "지금 H&M의 여성복 매장을 가야 할 것 같아."라고 나지막이 말했고, 가디건과 나는 한 배를 타게 되었다. 29,900원이라는 금액에 비해, 오랜 기간 많은 것을 해준 그 친구.


 소매가 엄청나게 늘어나 항상 걷어입어야 했고, 제법 많이 해지고 이곳저곳에 구멍도 났었고, 주머니가 없는 게 은근 불편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친구의 색이 참 좋았고, 어깨부터 길게 늘어뜨려진 그 느낌이 참 좋았다.

 

분명 모델분의 핏은 이런데.. 나는 왜..

 5년 후, 내가 찾은 곳은 런던의 중심지. 여성복 매장은 1층에 있었고, 내가 찾는 가디건은 입구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예전이랑 달라진 게 별로 없네, 하며 가격표를 살펴보니 £18.99와 함께 ₩29,900가 보였다. 반가웠다. 5년 간 나는 너를 제법 소중히 대하지도 않았고, 결국에 나는 너를 잃어버렸는데도, 너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여전히 그 자리에. 같은 가격으로.


 쥐색은 내게 맞는 사이즈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배송받을 수 있었지만, 나는 굳이 매장에서 데려가고 싶었고, 귀리색의 친구를 데려왔다. 옛 추억의 대용품이 아닌, 새로운 기억을 함께 하기로 다짐하며. 


 옛 친구를 통해서 알게 된 점은, 내가 누군가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딘가에서 잊어버리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길거리를 활보하는 가디건 갱단에게 약탈당할지도 모르니까. 순간순간을 사랑하는 하루가 되자. 

작가의 이전글 나는 열정적으로 게을리 지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