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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민 Jun 12. 2024

돼지껍데기와 씨 없는 수박은 어떤 조합인가.

240609

 오랜만에 D를 만난 것은 졸업식 직후, 천호동의 술자리에서였다. 우리는 각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고, 스쳐 지나가며 눈인사를 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이였다. 내가 자리하자 그가 소주를 따라주고, 이모- 여기 껍데기 둘이요-라고 외쳤다. 우리는 비린내가 잔뜩나는 차갑고 쫀쫀한 돼지 껍데기를 몇 점 집어먹으며 요즘 별 일은 없는지? 당시의 여자친구는 여전히 만나는지? 대학 생활은 어떤지? 요즘엔 어떤 음악을 듣는지? 등의 시시껄렁한 질문으로 우리에게 자리한 어색함을 털어냈다.


 별일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내가 피우던 담배가 단종되어 새로운 담배를 찾는 중이다. 여자친구와는 헤어졌다. 나한테 비전이 없다는데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에 비해 담배냄새 잔뜩 나는 가락동 음유시인은 좀 급이 안 맞긴 하지- 나는 이 친구들의 밴드에 합류하기로 했다. 새로 주문한 돼지껍데기를 마저 굽기도 전에, 새로 주문한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연습실 입구에는 구겨진 맥주캔과 담배꽁초가 잔뜩 놓여있었다. 숫총각들의 반지하 흡연굴이라는 느낌을 세상에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우리 밴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청소를 잘하는 건반 연주자였고, 이들은 적임자를 막 데려온 참이다. 필요한 곳에 도착했다는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다음에 누군가에게 영입 제의를 받으면 꼭 자세히 알아보고 승낙하기로 다짐했다.


우리는 음악으로 성공하진 못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연습실 월세를 충당해야 했고, 군대를 가야 했고, 더 이상 20대 초반이 아니었다. 나는 내 재능과 열정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청춘을 낭비하고 싶었고, 친구와 함께라면 더 좋았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자란 실력이 그들에게 짐이 되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D가 내게 전화하며 두 딸의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 큰 수술을 앞두고 있고, 우리의 옛 약속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함께 해주었다. 예전부터 D는 아들을 낳으면 내 이름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시시껄렁했던 이야기는 그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자애 이름으로 규민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돼지 껍데기가 땡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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