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9
오랜만에 D를 만난 것은 졸업식 직후, 천호동의 술자리에서였다. 우리는 각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고, 스쳐 지나가며 눈인사를 하는 정도의 적당한 사이였다. 내가 자리하자 그가 소주를 따라주고, 이모- 여기 껍데기 둘이요-라고 외쳤다. 우리는 비린내가 잔뜩나는 차갑고 쫀쫀한 돼지 껍데기를 몇 점 집어먹으며 요즘 별 일은 없는지? 당시의 여자친구는 여전히 만나는지? 대학 생활은 어떤지? 요즘엔 어떤 음악을 듣는지? 등의 시시껄렁한 질문으로 우리에게 자리한 어색함을 털어냈다.
별일이라고 하긴 뭐 하지만, 내가 피우던 담배가 단종되어 새로운 담배를 찾는 중이다. 여자친구와는 헤어졌다. 나한테 비전이 없다는데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명문대를 다니는 여대생에 비해 담배냄새 잔뜩 나는 가락동 음유시인은 좀 급이 안 맞긴 하지- 나는 이 친구들의 밴드에 합류하기로 했다. 새로 주문한 돼지껍데기를 마저 굽기도 전에, 새로 주문한 소주 한 병을 다 비우기도 전에.
연습실 입구에는 구겨진 맥주캔과 담배꽁초가 잔뜩 놓여있었다. 숫총각들의 반지하 흡연굴이라는 느낌을 세상에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우리 밴드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청소를 잘하는 건반 연주자였고, 이들은 적임자를 막 데려온 참이다. 필요한 곳에 도착했다는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다음에 누군가에게 영입 제의를 받으면 꼭 자세히 알아보고 승낙하기로 다짐했다.
우리는 음악으로 성공하진 못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연습실 월세를 충당해야 했고, 군대를 가야 했고, 더 이상 20대 초반이 아니었다. 나는 내 재능과 열정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청춘을 낭비하고 싶었고, 친구와 함께라면 더 좋았을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자란 실력이 그들에게 짐이 되어 미안할 따름이었다.
오랜만에 D가 내게 전화하며 두 딸의 아버지가 될 예정이라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 큰 수술을 앞두고 있고, 우리의 옛 약속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함께 해주었다. 예전부터 D는 아들을 낳으면 내 이름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시시껄렁했던 이야기는 그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여자애 이름으로 규민이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돼지 껍데기가 땡기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