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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May 08. 2024

한 우물만 팠더니 그 우물에 빠졌다 (9)

5. 우물 밖에 있는 것은?

어릴 적, 놀이동산을 만드는 게임을 했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놀이동산 부지 위에 나는 놀이기구도 만들고, 꽃도 심고, 아이스크림 가게도 만들어 사람들을 모았다. 사람들은 저 먼 세상 어딘가에선가 걸어와 내가 만들어놓은 세상을 즐겼다. 그 공간은 끊임없이 발전했고, 커졌고, 화려해졌다.


한참이나 공간을 꾸미다보면, 그 바깥 세상이 궁금했다.

그래서 마우스를 움직여 이리저리 가보면, 내 세상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까만 화면 뒤'에서 나와 내 세상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게임 속에서는 내가 만들어놓은 세상 이외의 세상은 모두 만들어져있지 않아서, 내가 궁금했던 다른 세상은 모두 검은 '제작되지 않은 화면'이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 내가 만들지 않은 게임 밖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라는 것을.







일을 그만뒀다.

15년간 일을 했으니, 같은 업계에는 종사했어도 같은 직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솔직히 말해 10년차까지는 일을 그만두기보다는 상황에 맞춰 일이 종료되면(내 업계는 건 단위로 일이 계약이 되어서, 업무가 끝나면 계약이 종료된다.) 일을 그만두고 다음 일을 찾는 편이었다. 그러다 점점 연차가 쌓일수록 맞지 않는 일이면 그만두기도 하고, 다른 일을 찾기도 했는데.

그러니까 그때는 '일을 그만두면 다음 일을 찾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다시 업계에서 일을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그만두겠다거나, '다시는'이 업종에서 일하지 않겠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그럼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 같았다.

하나는 진짜 내가 이 일에 질려서.

또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내가 이 일에서 더는 올라갈 곳도, 이렇게 어정쩡하게는 자리잡을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버려지기전에 내가 일을 버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이유가 무엇이던,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자! 그렇다면 뭘 해볼까?



...?



할 수 있는 게, 그리고 딱히 할 게 없었다.

내 삶은 일이 전부였고, 앞서 계속 말했듯이 워커 홀릭은 아니었으나 일 이외의 특별한 취미도, 취향도 없었다. 그냥 술을 좋아했지만 술 전문가도 아니었고, 사람을 좋아했으나 친구들을 만나면 그냥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딱히 취향의 이야기를 하지도, 덕질을 하지도 않았다. 친구가 야구를 보러 가고, 배구를 보러 가고, 때로는 아이돌에 미쳐있을 때도 '우와, 대단하네.'하며 구경했다.


일이 빠지니 나한테 남은 게 없었다.

우물을 탈출하면 대단한 탈출기가 있을 줄 알았더니 '그냥 우물에서 나온 사람 됨.' 그게 딱 내 상태였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을 들었을 때, 우린 대개 우물 안 개구리는 밖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물 밖에는 더 큰 세상이 있으니 그걸 즐기고, 경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갔을 때, 그 화려한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질까?

내가 밖으로 나가서 본 세상은 검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만들어놓지 않은 우물 밖의 세상은 그저 검고, 어둡고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보려고 하지도 않고, 노력하지도 않았던 세상에 있는 것이 화려하다고 한들, 나는 그것을 볼 시야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물 밖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 밖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던들 무얼 하겠는가. 나는 거기서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찾지 못했다. 놀거리, 할거리가 100만 가지가 있어도 그 안에 내 취향도 없고, 해보고 싶은 것, 일을 그만두면 할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일을 그만 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블로그'와 'PT'.

일 이외에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한 일이었다. 15년간 내가 일로 쌓은 커리어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곘어도, 일을 빼고나니 남는 게 이게 다였다.



주2회를 겨우 하던 PT를 주3회로 늘렸다.

블로그에 글을 써야 하니 주1회도 겨우 만나던 친구들을 주6회씩 만나기 시작했다.

주6회씩 사람을 만나면 미친듯이 블로그에 글을 썼다. 술을 못 마시면, 일상 글이라도 썼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니 책을 읽고, 그래도 돌아버릴 것 같으면 유튜브를 보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휴대폰으로 퍼즐 맞추기 게임을 했다.

그래, 운동을 하고, 술을 먹고, 블로그 하고, 책읽고, 유튜브보고, 게임했다.

운동, 술, 블로그, 책, 유튜브, 게임.

했던 거,

하고,

또,

하고,

또,

해.


돌겠네.


갑자기 새로운 취미를 찾기도, 새로운 꿈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인간들이 모두 새해 목표로 잡는 것들을, 나도 한다.

지루해서 이제 새해 목표에 쓰지도 않는 그거라도, 일단 한다.


목표가 없던 인간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남들 다 하는 거'라도 하는 게 중요했다.

나는 신촌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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