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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연 Oct 30. 2024

이방인, 환대, 기쁨의 커뮤니즘

사·과·세·알(사회과학으로 세상알기) 경상 국립대 시민강좌 기행(2)

경남 진주 - 사천 - 삼천포로 이어지는 완행버스는 도심을 빠져 나오자 남해의 풍경을 마음껏 차창에 담는다.  


시간의 흐름이 조금 느려진 것 같다.


진주를 빠져 나온 어느 시골 정류장에서 중년 남자가 느릿느릿 버스에 오른다. 앞자리에 타고 있는 내가 긴장한다. 혹시 버스기사가 신경질 부리지 않을까, 버스가 짜증내며 급출발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오히려 기사가 덕담을 나눈다. 사천시에서 어느 승객이 완행버스인데도 한 구간만 타고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달라고 부탁해도 군소리가 없다.


군데군데 정류장마다 느리게 타고 내려도 버스기사는 인사말을 건네고 후의가 넘친다. 어느 시골에서는 승객 마다 버스 기사와 아는 인사를 나눈다.   

   

어제 사·과·세·알(학으로 기, 경상대 사회과학원 주최) 시민강좌에서 이야기했던 한 대목이 떠오른다.      


나눔(sharing), 진정으로 인간다운 존재는 무엇을 주었는지 계산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존재     


어느 에스키모 마을에서 일어났던 사례다.


 사냥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미국인 A에게 에스키모 사냥꾼이 큰 고기 한 덩어리를 내놓았다. A는 깊은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에스키모인은 감사의 말에 오히려 화를 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도와야 해요. 오늘 내가 얻은 것을 내일 당신이 얻을 수 있어요. 여기 속담에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D.그레이버, 『부채 : 그 첫 5,000년』, 부글, 2011).     


에스키모 마을에서 진정으로 인간다운 존재는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계산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존재다. 강의실 앞자리에 있는 학생들 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책상 밑으로 떨어뜨린 볼펜을 기꺼이 주워주면서 ‘그 대가로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겁니까?’라고 누구도 결코 묻지 않을 것입니다.”       


나눔(sharing)은 서로 빚짐이 없이 주고받을 것을 기억하지 않는 기본적 삶의 바탕이다. 호혜만 하더라도 선물(증여)을 주고 받고 되돌려주는 책무가 내장되어 있다. 시장교환은 채권과 채무과 동시적으로 교환되는 거래행위다.      

나눔은 빚이 발생하지 않는 인간의 호의다.


 D.그레이버는 나눔이라는 두터운 마음의 행위를 기반적 공산주의(baseline communism)라고 부른다. 내가 할 수 있을 때 능력껏 행하고 내가 필요하면 그 만큼 얻어가는 것이다. 달리 말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커뮤니즘(공산주의)의 원리가 우리들 삶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T.V.프로그램의「달인」에서 능숙한 솜씨로 포장하는 큰 언니가 있었다. 신참내기는 서툴러서 실수가 많아 큰 언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해댄다. 큰 언니가 말한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어, 걱정 말어!” 일당은 똑같으니 ‘큰 언니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신참내기는 아직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삶의 기반 커뮤니즘’ 모습을 보인다.


삼천포에 도착해 전복죽을 먹고 나서(노산 공원옆 우도 전복죽) 잠간 길이지만 택시를 타고 삼천포 용궁수산시장에 내린다. 건어물을 살 것이라고 말하니 택시기사가 자기 친구 집이라고 「거창건어물」 가게 앞에 내려준다.      


삼천포 시장, 낯선 도시의 이방인에게 길거리까지 나와서 길을 안내해주는 환대     


오늘은 삼천포 항에서 가까운 사천시의 저도(楮島, 일명 딱섬)를 갔다 올 요량이라 마음이 바쁘다. 죽방멸치와 새우젓을 택배로 부치고 건어물 사장에게 “저도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으니 후다닥 몇 군데 건너 다른 가게로 달려간다. 조금 기다리자 헐레벌떡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 한 장을 건네주며 말한다.      


“저쪽을 돌아서 10분정도 걸어가시면 선착장이 나오는데 거기서 이 번호로 전화를 하면 낚시 배가 올 겁니다.”     


선착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길가에서 생선을 다듬는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사거리까지 나와서 손짓으로 알려준다.

다음 사거리에서 헤매다 다시 생선가게 안에 앉아있는 여사장에게 선착장을 물으니 얼굴에 콜드크림을 바르다 말고 밖에까지 나와서 “저쪽 냉동 창고에서 왼쪽으로 들어 가세요”라고 일러준다.      


겨우 선착장으로 들어서니 12시에 떠나는 여객선이 사량도, 마도, 저도를 가는 배였다. 떠나는 배는 아쉽지만 어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워서 좋았다.  낚시 배를 타려고 전화했더니 바람이 불어서 못 떠난단다.      


낯선 도시에서 헤매는 이방인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길거리까지 나와서 몸으로 길을 안내해주는 환대는 나눔의 목록에서 으뜸이다.       


섬 저도를 가는 방법은 삼천포 실안방파제까지 가서 왕복 낚시 배로 전화하면 가능할 텐데 여기라고 바다 바람이 안 불겠는가, 일정을 바꿔서 방죽멸치 잡이로 유명한 남해군 삼동면 지족마을을 가기로 했다. 다시 지족마을 가는 버스 정류장을 물어본다. 저쪽 편을 가리키며 길 건너는데 차 조심하라는 당부까지 덧붙인다.        


지족마을 가는 버스는 1시간에서 1시간 30분 간격이었다. 일단 택시를 타고 지족마을을 달린다. 택시기사는 남해를 바라보는 저쪽 밭이 전부 고사리라고 알려준다. 이 쪽 고사리는 기다란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전주 도청 부근의 육개장이 맛있어서 몇끼니를 먹었다"고 칭찬도 해준다. 남해 바다를 가르는 창선교량을 건너니 죽방멸치를 잡는 죽방렴이 바다 가운데를 유유히 바라본다.      


바닷바람에 몸이 날아갈 것 같다. 겨우 삼동면 행정복지 센터 쪽으로 걸어오니 지족 까페가 보인다. 따뜻한 차를 시켜서 쉬고 있는데 입구가 정류장인 듯 학생들이 앉아있다. 건너편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승객들이 시간 맞춰 까페 쪽으로 걸어와 삼천포 방향의 버스를 타고 나간다.


까페 여주인은 무거운 배낭을 기꺼이 맡아주고 죽방렴의 바다를 구경하고 오란다.      


삼동면사무소 입구에 100년쯤은 되어 보이는 늙은 향나무가 서로 고개를 마주하고 서있다. 허리를 비틀어 하늘을 감싸는 듯한 향나무에는 오랜 동안 바닷바람을 맞으며 마을과, 전통과, 전설을 간직한 경륜이 박혀있다.       


오후 4시 버스를 타고 삼천포로 나간다. 까페 여주인은 자기네 가게 식탁에서 좀 더 쉬다 가도 되는데 굳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아쉬움을 보인다.      


삼합, 전복죽, 세꼬시, 전복구이 수 없이 나오는 진주와 삼천포의 실비집 안주(일명 이모카세)      


오늘 저녁에 예약한 삼천포 이모카세(이모 마음대로 주는 코스 요리, 주인 마음대로 내놓은 요리의 일본말 오마카세의 변형)는 진주 보다 훨씬 멋있었다.      


막걸리 안주는 전주가 제일인데 최근에 와서는 기업형으로 바뀌었다. 막걸리 주전자를 비울 때 마다 주모의 찰진 안주들이, 말하자면 삼합(홍합, 수육, 새우젓, 톡 쏘는 김치), 오징어 볶음, 병어 감자조림, 참게장의 살을 후벼내 밥과 버무린 안주, 해물전, 생선찜  … 나왔는데 지금은 따스한 인간미가 많이 사라졌다. 어제 진주의 이모카세(어울림 한상차림)에서는 여주인이 모든 음식을 자기가 직접 조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삼천포 비엔나 실비」. 1인당 4만원인데 술 2병을 공짜로 주니 32,000원 꼴이다. 전복죽, 전어와 생산구이, 전복구이, 전어·광어·바다장어 세꼬시, 동그랑땡, 삼합, 불고기가 줄지어 나온다.      


키 크고 미인형의 여사장이 테이블을 돌면서 부족한 음식을 채워준다. 진주로 가는 차시간 때문에 추가로 나올 안주를 마다하고 현금을 지불하니 홀에서 서빙하는 아줌마까지 나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몇 차례나 한다.   



환대(L'Hospitalité), 우리들의 근본적 행위이며, 인간의 삶의 기반인 커뮤니즘(공산주의)    


어제 진주 음식점에서 5천원짜리 와인을 주로 마신다고 하니까 K교수가 조금 등급을 높여서 마시면 괜찮을 것이라며 하나를 추천해줬다.  영화배우 같은 K교수는 인기도 없고 자칫 호구지책도 면할 수 없을 마르크스 경제학을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K교수가 스마트 폰에 띄운 와인 브랜드는 L'H OSPITALET였다. 프랑스 철학자 J.데리다의 유명하고도 난해한 책 『De L'Hospitalité』(환대에 대하여)와 같았다. 데리다는 우리 인간생활 전반에 걸친 근본적 행위를 환대로 본다.       

어원으로 의미를 더 살피면 host(주인)의 hospitality(환대)는 hostility(적의)를 사라지게 만든다. hospital(병원)도 환대의 공간인데 많이 변했다.


K교수에 와인 브랜드 이름을 ‘환대’로 옮겨도 좋으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인터넷을 뒤지니 샤또로스피탈레 와인은 석회암 지질과 햇빛이 잘 드는 기후의 피레네 산맥에서 물려받은 토양을 특성으로 한다. 특히나 1561년 순례자들이 환대를 받던 역사적 특성도 간직한 곳이다. 순례자를 와인 대접으로 환영하듯 ‘와인 없이 환대없다'(sine vino, vana hospitaltas)에서  연유하는 와인이었다.      


낯선 도시에서 방랑하고 여행하는 우리에게 환대는 뜻밖의 선물이었다. 이번 가을, 사·과·세·알의 시민강좌 기행으로 진주 남강과 삼천포의 바닷가에서 얻었던 환대는 감사하게도 모두 공짜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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