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남긴 원시화폐(2)
현대 화폐를 인간화하는 노력, 화폐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며 언어
“사람들 대부분은 소득을 얻자마자, 돈이 들어오는 원천에 제약을 가하고, 특정목적을 위해 지출 종류별로 화폐에 할당 표시(earmarking)를 하고, 자신이나 부인이 임으로 돈을 쓸 수 있는 자유를 한정시킴으로써 화폐를 원시화(primitive) 하려고 노력한다.”(Mary Dougals)
돈이 들어오는 과정과 성격이 순수한지 불순한지에 따라 소비지출도 제약된다. 근면하게 번 돈은 자녀들의 수업료와 학용품으로 사용되지만 그렇지 않은 돈은 꺼림칙하기 마련이다. 어제 회사에서 특별보너스를 받은 돈은 다음날 아침에 자랑스럽게 집에다 갖다 줄 수 있다. 뇌물로 얻은 수입은 유흥비로 빨리 탕진해서 마음의 흔적을 없애야 직성이 풀린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매춘부는 자신의 수입을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더러운 돈으로 간주해 마약, 알코올, 의상 구입 등으로 날려버리는 데 반해서, 정부의 생활보조금이나 사회보험 급여 등 합법적으로 들어온 돈에 대해서는 1원 한 장이라도 쪼개서 쓴다.
돈에도 제목이 붙는다는 마음의 회계(mental account) 역시 화폐를 끝없이 원시화폐화 시키려는 행동양식과 밀접하다. 지갑에 10만원을 넣어두면 하루 이틀이 지난 뒤에는 어느새 다 없어지고 만다. 만약 10만원 가운데 3만원은 비상금이라고 돈에 제목을 붙여서 지갑 다른 칸에 넣어두고 지출용도를 할당하면 좀처럼 꺼내 쓰지 않게 된다. 어떤 사람은 회사에서 출장비를 받으면 자신의 용돈과 구별하기 위해 지갑의 다른 칸에 넣어두고 공무와 사적 용도별로 나눠서 쓴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옛날 내 어머니의 장롱에 숨겨진 가계부에는 노란 봉투가 여러 개 들어 있었다. 봉투마다 적금, 연탄, 수업료, 잡부금, 음식, 아버지 용돈, 공과금 등의 지출용도가 적혀있었다. 그 시절의 아버지 월급은 어머니 손에 의해 지출 항목별로 칸막이가 쳐진 대로 배분되었다. 아버지가 용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다른 지출봉투가 열린 적은 없었다.
현대 화폐는 겉으로 보기에는 동질적이고 똑 같은 돈이지만 문화적 모체(母體)에 따라 상징적 의미를 다양하게 보여주는 ‘화폐의 상이성(heterogeneity)’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동아프리카 케냐의 루어(Luo) 부족에서 볼 수 있는 현대화폐의 원시화는 주목할 만하다. 루어족의 인류학적 조사는 현대 통화의 문화적 중립성이 오류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대부분의 루어족 사람들의 마음에는 선조들의 영(靈)이 활발히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 뿌리를 갖는 문화적 모체가 동질적인 현대 화폐에 상이성을 부여하고 다층적인 상징적 의미를 생산한다.
루어족은 금지된 거래에서 얻은 화폐는 의례를 통해 돈의 속성을 변화시키고 화폐 소유자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지 않으면 불임성(不姙性)을 갖거나 생산적이지 못하고 결국에는 쓸모없어지게 된다고 믿는다. 대체로 금지된 거래의 ‘꺼림칙한 돈(bitter money)’이란 토지, 금, 담배, 대마초, 농장의 수탉 등을 판매한 돈을 가리킨다. 이들 특정한 거래 금지의 목록은 영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돈은 악마(evil)의 돈 내지는 꺼림칙한 돈과 좋은 돈으로 이원화된다. 예를 들어 땅 판 돈으로 가축을 산다면 동물들이 죽을 것이고, 담배 판돈으로 결혼할 신부의 지참금에 보태면 새 각시는 머지않아 연기와 불 속에서 사망할 것이라 믿는다.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매각하는 일은 조상을 팔아먹는 것이나 똑같다. 담배는 선조의 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물로 여긴다. 담배를 파는 것은 조상과 영적 믿음에 불경을 저지르는 일이었다. 수탉은 가족들의 건강과 관련해 강력한 상징적 의미를 띤다. 농장의 수탉을 파는 일도 가계의 안녕을 팔아치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금지된 품목을 파는 일은 반사회적 행위였다.
화폐는 선조의 영적 흐름이 내재하는 금지된 품목에 따라 좋은 돈과 나쁜 돈으로 이질화되고 다양한 사회적 의미를 발현해낸다. 케냐 루어족이 사용하는 화폐는 공동체의 심층 구조와 영적 믿음에서 발원하는 다양한 상징체계(symbolism)를 창출하고 고유한 사회 경제적 질서를 적합화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루어족의 현대화폐는 경제적 기능을 넘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며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화폐는 커뮤니케이션, 언어, 기억과 상상의 창고
커뮤니케이션은 우리가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과 세상에 메시지를 보내고 받고 해석하는 과정이다. 화폐의 원시화는 똑 같은 돈을 좋은 돈과 나쁜 돈 또는 더러운 돈과 깨끗한 돈으로 이원화하여 조상들의 영적 존재와 믿음을 실어 나르는 작업이며, 나아가 사회를 전통과 유기적 관계로 연결하여 보다 건강하게 만드는 언어이자 상징화 작용이다. “화폐는 종종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움직이는 생명 없는 객체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화폐는 산자와 죽은 자의 집단적 영(靈)이 스며든 인간 존재들의 창조물이다.”(Keith Hart)
마르크스의 지적대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화폐는 소외, 물신숭배, 수탈, 비인간화를 이끈다. 그래도 현대인들은 물신화된 자본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화폐를 다시 인간화시키는 노력을 끊임없이 수행한다. 불순에서 순수로, 속에서 성으로 나가고자 하는 의미의 상호작용으로 건강한 생명력을 되살리고 있다.
천선생이 돈을 벌어 전당포에서 되찾아간 할머니의 수미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아마도 집안의 가보로 대물림되며 천선생이 올바른 길로 걷도록 깨달음을 주었던 유훈(遺訓)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할머니의 기일이 되면 천선생의 자손들은 수미전이 들어있는 철제 과자 통을 꺼내놓고 과거를 회상하지 않을까? 철제 과자 통은 소중한 교훈과 기록을 담은 메모리 뱅크(Memory Bank, 기억의 은행)가 되어 후손들에게 마치 할머니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테이프처럼 소중한 기억을 들려줄 것이다.
우리들에게 화폐의 ‘기억하기’(remembering) 기능은 종이통장의 추억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근 금융 전산화에 따라 종이통장을 점차 없앤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생애 첫 월급이 찍힌 통장을 보며 가슴 벅차오르던 순간, 결혼할 때 보태라며 건네주시던 어머니의 손때 묻은 통장을 받고 눈물 훔치던 그때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어느 막내며느리에게 종이통장은 시어머니의 정이 깃든 유품이었다. 시어머니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막내며느리인데도 자기를 모시고 사느라고 너무 고생이 많았다. 줄게 이것뿐이 없다. 큰돈이 아니어서 미안하다”며 자식들한테 꼬박꼬박 받은 용돈을 저축한 통장과 도장을 쥐어 줬다.
통장에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5000원, 10,000원씩 입금 내역이 빼곡했다. 며느리는 그 돈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아들 대학등록금에 보탰다. 어떤 공장 경비원은 “적지만 매달 조금씩 쌓여가는 통장 액수를 보면서 집사람과 미래를 그리고 꿈을 키우던 그 시절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화폐의 메모리 뱅크는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고 상상하는 창고였다.
화폐(money)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모네타(moneta, 국가 화폐와 재정을 보호하는 신성한 존재, 유노 모네타 사원에는 조폐소가 있었음)는 기억의 여신이며 뮤즈들(the Muses)의 어머니이다. 9명의 뮤즈는 춤, 노래, 음악, 연극, 문학에 능했으며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이었다. 악보가 없었던 시대에 기억력으로 음악을 연주하고 지나간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학문의 여신이기도 했다. Muse는 museum(박물관)과 music(음악)의 어원이 된다. 모네타에서 파생된 동사 moneo는 remind(되돌아 보기)라는 동사를 낳아 ‘상기시키고 회상한다’는 뜻에다 ‘충고하고 가르치며 말하고 알려주고 지적하며 예언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조개 목걸이 화폐는 기억을 저장하고 증여하는 기쁨과 가치의 상징
어느 일본인 인류학자가 남태평양 뉴기니 섬의 동북쪽에 섬의 무리로 이루어진 솔로몬제도(Solomon Islands)를 조사했다. 그 곳은 현대화폐인 솔로몬 달러(SBD)와 함께 고래이빨과 조개목걸이의 원시화폐로 함께 쓰였다.
1998년 12월 31일 늦은 밤 10시였다. 솔로몬의 말레이타 섬의 촌락에서 성대한 의례가 열렸다. 마을의 양쪽 가문이 모두 모였다. 주최 측에서는 돼지 9마리로 준비한 음식, 토란, 바다거북, 물고기, 쌀, 통조림 등을 대량으로 장만해 거대한 향연을 벌였다. 이때 의례행사의 절정은 2마리의 산돼지와 5줄의 조개 목걸이를 끈으로 묶어 놓고 그 앞에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양쪽 가문의 큰아버지에 드리는 연설 장면이었다. 일본인 학자는 의례 행사의 모든 장면을 비디오로 찍었다. 훗날 증여의례와 조개화폐의 역할을 여러모로 되새김하고 의미를 찾는 귀중한 기록물로 삼을 작정이었다.
다음날 비디오의 모니터 화면에서 어제의 연설장면을 보았던 마을 장로는 “혹시나 비밀스러운 행사를 찍었다고 불쾌할지도 모르겠다”는 일본인 학자의 우려와는 달리 뜻밖에도 기뻐했다. “이것은 너무나 좋은 물건입니다. 이 비디오카세트를 저에게 줄 수 없나요”라고 장로는 물었다. 일본인 학자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같은 물건을 하나 더 만들 수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장로는 “오히려 그 쪽이 더 좋다. 그리고 이왕이면 카피본을 2개 더 부탁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인 학자는 “이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고 비디오 재생장치도 없어서 비디오카세트만 갖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확인해주었다. 그러자 장로는 “전혀 상관없다. 내 모습과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가 상자(비디오카세트) 속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내 자식과 자손들이 이 검은 상자를 보면 내 연설을 생각해낼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일본인 학자는 비디오카세트에 얽힌 에피소드를 회상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의례장면을 담은 영상기록 매체에는 화폐의 역할을 담은 역사이며 기록이 담겨있다. 의례행사에서 양쪽의 씨족들은 산돼지와 1만 솔로몬 달러의 화폐를 주고받는다. 식료품은 먹고 없어지지만 화폐는 서로 상대방의 수중에 그대로 남는다. 자손들도 서로 주고받은 화폐를 바라보며 그때의 광경을 회상해낸다. 조개 목걸이 화폐는 기억을 저장하고 마을 공동체에 깊숙이 담겨있는 증여의 기쁨과 집단적 가치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조개 목걸이화폐처럼 재생할 수 없는 비디오카세트 역시 기억의 상징재로서 원시화폐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일본인 학자는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수미전은 할머니의 음성이 담긴 비디오테이프이며 낡은 철제 과자통은 비디오카세트의 검은 상자와 같지 않을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