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은 읽었을 대니엘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로빈슨 크루소』(1719)는 지금도 다양한 콘텐츠와 버전으로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무인도에서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의 원형이 되거나 모험과 강인한 정신을 키우는 극기 훈련도 모두가 로빈슨 크루소의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단순한 모험이나 무인도 탈출기로만 알려진『로빈슨 크루소』는 근대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합리적 개인의 성장 이야기로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파란만장한 주인공의 여정은 영국의 상인 자본가나 중간계급의 부르주아가 어떻게 커나가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로빈슨 크루소는 영국 식민지 글로벌리즘의 인간을 상징하는 모델로도 규정된다. 『율리시스』의 난해한 장편소설가로 익히 알려진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도 로빈슨 크루소의 캐릭터를 “남성적 독립심, 냉담한 잔인성, 끈질김, 느리지만 효율적인 지적 능력, 성적 무관심, 실용성과 잘 조화된 종교심, 계산 아래 이뤄지는 과묵성 등 앵글로 색슨 정신의 모든 면”이 투사된 영국 제국주의의 진정한 원형이라고 말한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상징적 캐릭터는 구체적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아예 경제학 방법론의 아이콘으로도 자리 잡게 된다. 경제학 교과서에서 최고의 인간모델로 삼고 있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최대 효율과 만족을 얻는 합리적 계산가이며 동시에 이기적 인간의 원형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철저한 합리적 개인주의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서구 특유의 종교적 통과의례도 반드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내면화하여 마침내 신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근면 성실과 노동의 가치를 깨달아가는 종교적 수용 과정은 빼놓을 수 없다. 아울러『로빈슨 크루소』소설은 사업에 뛰어들어 커다란 실패도 맛보고 수많은 작품과 평론 팸플릿을 쓰거나 정치적 모험도 마다하지 않으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대니엘 디포의 개혁적 구상과 당시 영국의 경제적 사정도 고스란히 담겨있는 작품으로도 단단히 한 몫 하고 있다.
종교적 깨달음, 노동, 근면 성실을 통한 근대 부르주아의 탄생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도착하여 온갖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1년을 보낸다. 그런 가운데 문득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기적 같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난파선에서 가져온 보리 씨앗이 섬에서도 푸른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을 보고 더욱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솟구친다. 종교적 깨달음은 지난 과오를 되돌아보며 회개하고 서서히 신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신앙적 삶의 각오로 이어진다. 먼저 그는 아버지의 충고를 거역하고 모험과 투기로 일확천금을 얻으려 했던 허영심을 뼈저리게 반성한다.
중산층이었던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는 집을 떠나려는 아들에게 간곡히 충고했다.
“요행수를 바라지 말거라. 세상의 재난은 거의가 상류와 하류층의 사람들 것이고 중류층(the middle station of life)은 재앙을 당하는 일이 매우 적으며 흥했다가 망하는 터무니없는 기복이 없어서 좋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중산층의 생활이다. 만약에 네가 이렇게 집을 뛰쳐나가 어리석은 짓을 한다면 신은 너를 결코 축복해주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전반기 영국에서 외국무역은 모든 운을 하늘에 맡기고 실패하게 되면 파산하고 다행히 성공이라도 하면 큰돈을 버는 일종의 모험행위였다. 당시 투기와 요행수로 벼락부자가 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모험에 뛰어들게 했다. 그 중에서 우리들에게 『딕과 고양이 Dick Whittington and his cat』(1605)로 알려져 있는 당시의 명작동화는 대표적이다.
만화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딕과 고양이』는 우리의 전래동화처럼 권선징악 보다는 행운이 뒤따르는 성공(fortune)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350년경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딕 휘딩턴은 무척 가난한 탓에 황금이 넘쳐흐른다는 대도시 런던으로 길을 떠난다. 실망스럽게도 런던 시내는 황금은 커녕 쓰레기와 쥐새끼들로 넘쳐 났다. 딱히 갈 곳도 없는 휘딩턴은 우연찮게 대규모 무역상인의 저택에 머문다. 휘딩턴은 다락방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그나마도 쥐새끼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구두닦이로 번 돈을 털어 고양이 한 마리를 산다. 그 뒤로 고양이 앞에서 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자비심 많았던 저택의 대상인은 곧 동방으로 떠날 무역선에 하인들한테도 투자할 것을 권한다. 이런 식으로 개인이 유한책임으로 투자하고 이익과 손실을 함께 공유하는 방식이 주식회사(company)의 시초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돈 한 푼 없었던 휘딩턴은 투자를 겸하여 그 동안 정들었던 고양이를 배에 실어 보낸다. 동방으로 가던 배는 거센 풍랑을 만나 몇 번이나 비틀거리면서 가까스로 낯선 항구에 닻을 내렸다. 만화영화에는 아프리카에 기착한 것으로도 되어있는데 어쨌든 그 곳의 왕은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하기로 했다. 하지만 궁전에서 뒤끓고 있는 쥐들이 산해진미로 가득 찬 저녁 만찬을 벌떼같이 달려들어 망쳐 버린다. 마침 휘딩턴이 보냈던 고양이가 쥐들을 모두 소탕해버리자 왕은 감격하고 만다. 고양이가 막대한 돈을 받고 팔렸음은 당연했다.
휘딩턴은 요행히도 떼돈을 벌었고 나중에 평소 마음에 품고 있었던 대상인의 딸과 결혼도 하게 된다. 훗날 그는 네 차례나 런던시장을 지내고 엄청난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있는 명작동화의 내용이지만 여전히 휘딩턴 가문의 문장(紋章)에는 항상 사랑과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한 징표로서 고양이를 새겨 넣는다고 한다.
무인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휘딩턴의 고양이처럼 투기적인 방법으로 일확천금하려고 했던 지난날의 비합리적 생활을 참회하고 신을 내면 깊이 받아들인다. 부친의 충고는 아버지이자 곧 하나님(God the Father)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의 이야기는 신에 대한 불복종과 징벌을 통해 인간이 회개하고 구원을 향해간다는 주제를 바닥에 깔고 있다. 이제 로빈슨 크루소는 매일 기도하고 하루하루의 생활도 기록하며 근면 성실한 노동으로 합리적 생활을 실천해 나간다. 미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매일 청교도의 덕목을 실천한 결과를 일기장에 기록했던 것과도 흡사하다.
로빈슨 크루소는 차변과 대변으로 복식부기를 작성하여 경제적 손익계산도 따져보는 계산 합리적 자세도 몸에 익힌다. 게다가 회계장부에 자신이 처한 똑같은 상황을 불행과 행운의 시각으로 나눈 다음에 대차대조표 방식으로 정리했다. 가령 ‘나는 몸에 걸친 의복이 하나도 없다’는 상황에 대해서 이런 불평은 악마의 유혹(devil)이라고 이름 붙여서 왼쪽 차변에 놓았다. 다르게 생각을 바꿔서 ‘그래도 나는 열대지방에 있고 설사 의복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몸에 걸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선하고 긍정적 생각(good)’을 오른쪽 대변에 설정하여 신에게 깊이 감사하고 기도드렸다.
아버지, 즉 신의 말씀을 내면화시켜서 종교적 깨달음으로 나가는 부르주아의 성장 과정은 중산층의 가족 관념으로 연결된다. 다시 이것은 가족의 재생산(결혼과 자녀의 탄생)과 사회적 재생산(노동력의 배분)으로 이어져 근대 자본주의 경제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특히 중산층의 가족, 청교도, 자본주의라는 연결고리는 지그문트 프로이드나 질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그리고 막스 베버(Max Weber)의 논의에서 더욱 확실한 해명을 들어볼 수 있다.
욕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가족주의
로빈슨 크루소의 큰 형은 스페인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고 둘째 형도 가출하여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에 와서는 자신마저 고도의 섬에 갇힌 불행한 신세가 되었으니 모두가 아버지의 충고를 어겼던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령과 권위는 가족을 굳건히 지키는 절대적 조건이 된다. 로빈슨 크루소가 진즉 아버지의 충고만 들었더라면 부친의 말처럼 “질투의 격정에 사로잡히거나 분에 넘치는 야망에 몸을 태울 일도 없이 절제, 중용, 평안, 건강, 사교, 오락, 기쁨 등 신의 축복이 따라 다니는” 안정적이고 행복한 중산층의 생활을 영위했을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근대 자본주의에 적합한 가족의 욕망구조를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묶어 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모험과 투기를 찾아 떠나려는 아들을 붙잡아 건전한 중산층의 인간으로 키워내고 근대 자본주의가 바라는 노동의 재생산 영역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탈주하려는 로빈슨 크루소적인 욕망을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라는 가족 삼각형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묶어 놔야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가족의 욕망구조에서 아버지를 어기거나 뛰어넘는 일은 금기다.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던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눈을 찌르고 공동체 밖으로 스스로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는다. 로빈슨 크루소에게 내려진 신의 형벌도 아버지를 어긴 오이디푸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시니피앙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라는 명제를 가지고 오이디푸스와 아버지를 이해한다. 먼저 시니피앙이란 무엇인가. 가족의 호칭에서 아빠, 엄마, 아들, 딸이라고 부르는 언어처럼 표현된 기호(sign)가 시니피앙(signifiant, 기호표현)이다. 그런데 언어 기호는 단독으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언어는 차이의 체계 속에서 의미를 드러낸다. 체계 내의 다른 기호와의 대립관계(차이)에 따라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 즉 시니피에(signifié, 기호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호표현으로서 빨간 신호등은 단독으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다른 파란 또는 노란 신호등과 함께 교차로에 걸리게 됨으로써 비로소 ‘멈춤’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언어는 사물을 따라다니는 단순한 이름이나 기호표시가 아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사물이 존재한다. 언어가 없으면 존재 또한 없다. 아버지라는 언어가 없으면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매 한가지다.
언어 또는 시니피앙은 존재를 부여하고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와 상징(시니피에)들은 구조화된 어떤 질서와 그 나름대로의 세계를 이루어 간다. 난혼시대의 근친상간은 나와 이모가 아내의 관계도 될 수 있으며 언어호칭의 혼돈은 하나의 질서화된 친족관계 또는 사회적 질서가 와해된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계기를 통해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 질서)로 옮아가게 된다. ‘하지 말라!’고 하는 근친상간의 금지(incest taboo)는 혼돈스러운 성의 욕망 코드에 질서를 부여했다. 씨족은 점차 분화되고 대가족으로 갈라졌다.
마침내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구분되면서 일부일처제의 가족단위로 진입한다. 자유스럽고 무질서한 성적 욕망과 충동도 가정이라는 상자 속에 가둬지게 된 것이다. 원초적 충동은 가정의 틀 속에 가두어져 버리고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라는 삼각형의 욕망으로 묶였다. 자본주의는 가족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위해 홈 스위트 홈!을 외쳐 불렀으며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성의 욕망 또한 금기시되었다.
다시 라캉의 “시니피앙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를 풀어 보면 이렇게 된다. 아버지라는 호칭의 시니피앙을 통해 무질서한 욕망은 근친상간 금지라는 도덕적 법률 속으로 진입하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가 모습을 갖추게 된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가정에서 불리는 단순한 호칭을 넘어서 사회적 질서와 법률 등의 외부적인 것과 연결된다. 아버지는 곧 사회질서와 윤리도덕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뛰어넘는 일은 금기사항이다.
지금도 문학과 영화 속에서 최고의 욕망인 금지된 사랑은 언제나 금기의 경계선을 서성이며 인간 깊숙이에 자리 잡은 원초적 욕망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그렇지만 금기를 깨뜨리는 일은 가정과 사회에서 매장되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하는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자초할 뿐이다. 이것이 아버지라는 이름의 시니피앙 속에서 존재 지워지는 자식의 인간조건이다. 이제 아버지에 의해 억압된 욕망과 금기는 문명화된 인간질서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로빈슨 크루소적 욕망은 가족 안으로 제한되고 가정은 타인의 시선에서 차단된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된다. “거칠고 험한 외부세계와 반대로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가 충고했듯이) ‘젖과 꿀이 흐르는’ 편안하고 행복한 안식처로 가정을 만들려는 욕망의 배치가 탄생한 것이다. 18세기 후반, 혹은 19세기에 부르주아의 가정에서 가장 먼저 발생한 이러한 새로운 욕망의 배치에 우리는 ‘가족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시니피앙으로 가둬진 욕망과 가족의 형성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기호의미가 내포된 시니피에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다. 아버지의 메타포는 바로 하나님이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충고할 때 전율할 정도로 신의 이름을 들먹인다. “내가 너를 위해 기도를 그치지 않겠지만 신은 너를 축복도 해주지 않을 것이며, 네가 딱한 환경에 빠져서는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도착하기 전에 풍랑을 만나거나 고독한 환경 속에 처해있을 때 한결같이 하나님이 나에게 내려준 천벌로 생각하며 혹독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누구나 어려운 곤란을 처하게 된다. 때로 행운과 불행은 우연적이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하나님의 형벌과 은총으로 나눠서 구분하고 인과관계를 필연화 시켜가는 종교적 구도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끊임없이 심어놓은 반영물에 지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조금 비틀자면 “죄책감은 아들이 체험하는 내면적 감정이기 이전에 아버지에 의해 투사된 관념이다.”
아버지를 매개로 해서 로빈슨 크루소를 죄책감으로 몰아넣고 근대적 부르주아의 인간형으로 만드는 과정은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인간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신과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근대적 자본주의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역시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다.
신과 인간의 조건 : 프로테스탄트와 호모에코노미쿠스
막스 베버는 로빈슨 크루소로 상징되는 근대 부르주아를 프로테스탄트가 만들어낸 독특한 인간형으로 바라본다. 막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 역시 물질적 탐욕 보다는 종교적 덕목을 끊임없는 의무감으로 실천하고 근면 성실과 철저한 시간 관리로 부를 추구하는 금욕적(ascetic) 인간의 전형적 부르주아라고 지적한다.
일단 막스 베버는 종교적 구원과 근대 자본주의에서 부의 추구를 칼뱅주의(calvinism)로 설명해간다. 종교 개혁가 장 칼뱅(Jean Calvin)의 교리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미리 예정해 놓았다는 예정설(predestination)을 주창했다.
그때의 사람들은 과연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죄의 나락으로 떨어지도록 하나님이 어떻게 예정해 놓았는지를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하나님은 오늘날과 달리 무섭고 엄격한 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를 알려고 노력하거나 구원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대한 불안과 의혹, 세속의 온갖 잡념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마치 의사가 암인가 아닌가를 최종적으로 판정하기 전에 병원 대기실에서 왔다 갔다 불안해하고 뭐든지 매달리고 싶은 환자의 심리적 행동과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신의 뜻을 따르는 청교도적 삶 속에서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주관적으로 확신해간다. 금욕적으로 생활하여 신의 영광을 더하고 현세의 직업을 천직으로 알고 충실히 봉사하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calling)으로 삼았다. 칼뱅은 엄격한 교리에 따르는 고통의 보상으로서 근면 성실하게 노동한 결과물, 그리고 최소한도의 정상이윤만을 받고 거래하는 합리적 경영 등으로 이뤄진 모든 물질적 부와 세속적 성공을 구원의 증거로 인정해주었던 것이다.
당시는 신과 인간의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서 도대체 하나님의 생각이 뭔지 짐작할 수도 없고 자신이 구원을 받고 있는지 어쩐지 알 수도 없는 불안과 허무주의에 빠져 있었다. 결국 베버의 입장에서 보면 종교적 불안은 현세적 금욕과 직업에 대한 충실로 연결되어 유럽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에토스가 되었을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매일 노동하며 종교적으로 구원을 받고 새로운 인간유형으로 거듭나려는 시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베버의 독특한 논리가 필연성은 없을지라도 당시 신과 인간의 조건을 설명하는데 어느 정도 유용한 것은 틀림이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가족이라는 삼각형 욕망의 재배치와 프로테스탄티즘(청교도)의 내면화를 통해 합리적 개인의 근대적 자화상을 그려낸 소설로 평가된다. 게다가 경제학에서 오직 경제적 동기와 이윤 극대화를 위해 행동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 또는 경제적 동물)의 원형을 이룬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냉철하고 합리적이고 때로 무자비한 로빈슨 크루소와 이기적 경제인으로서 호모 에코노미쿠스에는 분명한 차이가 난다. 지금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고뇌하고 성찰하는 종교와 윤리적 관계를 모두 단절하고 오직 시장에서 경제적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경제적 동물로 전락한지 오래다. 더구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학의 방법론적 인간으로 남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괴물로 부활하여 비윤리적인 탐욕과 부패로 금융위기를 일으키고 엄청난 부를 소수 독점하는 1퍼센트의 영웅으로까지 나가고 있다.
문득 대학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경제학을 처음 배울 때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존재야말로 합리적인 사람들이 따르고 본받아야 하는 모델인 줄 알았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착각을 나중에 철학자 앨프리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다음과 같이 지적해 주었다. “일단 추상화가 되면 그것을 구체적 실재로 착각하게 되어 이른바 ‘오도된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범하게 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가 탐욕과 부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스템으로 가야한다는 수많은 비판의 핵심은 결국 자본주의적 인간의 내면을 성찰하고 윤리적 회복에 있다는데 모든 논의가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