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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연 Oct 29. 2024

체념, 탈주, 풍요의 탈성장 경제철학

사.과.세.알(사회과학으로 세상에 알기) 경상국립대 시민강좌 기행(1)

사·과·세·알(학으로 상 알기, 경상대 사회과학원)이라는 시민강좌 한 꼭지를 열기 위해 전주에서 출발해 2시간 만에 진주에 도착했다.


남강에서 벌어졌던 유등축제의 흥분도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지 가을비가 버드나무처럼 춤을 춘다. 전주와 진주는 획 하나 차이인지라 길거리 간판을 보다가 잠시 여기가 전주인가 진주인가 헷갈린다.     


사과 한 알로 특강을 시작한다.      


10월 어떤 도서관의 테마는 ‘왜 사과 한 알에 만원인가?’였습니다. 기후위기, 작황, 인플레이션, 꿀벌, 종의 다양성에 관한 책들을 기획했다고 합니다. 사과 한 알이 시대의 위기를 표상해주고 있습니다.          


사과 두 알은 조금 아쉽습니다. 집주인 부부가 하나씩 먹으면 사과접시는 텅 빕니다. 사과 세 알은 있어야 접시에 하나가 남게 됩니다. 남은 하나의 사과는 누군가 손님을 초대하는 환대의 손짓입니다.     


역시 사과 세알입니다. 오늘의 강좌 주제 “경제학을 다르게 보는 방법에 대하여”를 전체적으로 감싸는 사·과·세·알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과, 생명은 죽음에 빚진 것, 죽음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체념이 탈성장 철학     


첫 번째 사과는 다 아시다시피 선악과(지식의 나무)입니다. 기독교 관점에서 금단의 사과를 따먹게 됨으로써 인간은 죄를 짓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에서 비롯되었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죽음 때문에 생명을 잉태’하는 계기가 됩니다. 지상에서 인간 존재와 생명은 죽음에 빚진 것(debt)입니다.      죽음에 빚진 생명의 유한성은 명백합니다. 죽음의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이를 기꺼이 수용하는 일,  고도의 내적 결단으로서 죽음을 체념(resignation)할 때 우리는 유한한 삶을 어떻게 하면 치열하게,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어느 것에도 예종되지 않고 인격과 개성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저도 여전히 죽음이 두렵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성찰하고 죽음을 훈련하며 생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합니다.      


죽음을 망각하면 무한한 욕망을 꿈꾸게 됩니다. 무한성은 불멸의 상징인 금과 화폐에 자신의 확장을 의탁하기도 합니다. 정신병리학적으로 전이현상이라고도 합니다. 무한 욕망은 무한한 경제성장으로 나타납니다. 프랑스의 탈성장론 경제학자 세르주 라투슈는 미세한 풀꽃 씨에서 우주를 보듯이 ‘유한에서 무한을 찾는 영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가을날 높고 푸른 하늘에 점점이 박힌 기러기를 보거나,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에서 무한성을 찾는 영성을 ‘내재적 초월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영생을 기독교의 신에서 찾는 작업은 ‘외재적 초월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굴러내려 새로운 세계로 탈주하는 노마드(유목민)의 상징     


두 번째 사과는 역시 뉴턴의 사과이겠죠. 뉴턴 이전에 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직접 주관하는 제1원인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한발 물러서서 법칙으로 자신의 의지를 인간 세계에 구현하는 제2원인으로 머뭅니다. 위대한 시계제작자(The Great Clockmaker)이거나 위대한 디자이너가 됩니다. 이것은 신을 이성적으로 파악한다고 해서 이신론(Deism, 理神論)이라고 부릅니다.      


뉴턴은 우주를 정밀한 부속품들이 결합하여 스스로의 운행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장치로 보았습니다. 거대한 기계장치는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 제작된 산물이었습니다. 기계 운행의 최종지점은 균형과 안정을 지향합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종 지점으로서 파라다이스(천국)과 같은 것이죠. 뉴턴의 기계론은 최종 목적지를 안고 있는 목적론(teleology)입니다. 시장경제도 국가가 개입하지 말고 자유방임하면 결국 균형점으로 간다는 이치와도 같습니다. 시장경제는 신학의 장치를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뉴턴은 정원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통해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산 비탈길에서 굴러 내려가는 사과를 보지는 못했지요. 사과는 왜 둥근 것일까요. 바로 데굴데굴 도망가서 자기를 낳아준 사과나무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죠. 힘차게 굴러서 멀리 다른 세계로 나가든, 아니면 곰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배설물의 씨앗으로 빠져 나오든, 낯선 땅으로 탈주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과는 노마드(유목민)의 탈주로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안내자입니다.      


세 번째 사과, 인간과 비인간의 성스러움과 활력에서 찾는 탈성장 경제의 풍요로움       


세 번째 사과도 잘 아시는 것처럼 스피노자의 사과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유명합니다. 이는 당장 지구가 망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인간의 의지와 자세를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듭니다. 인간들의 전쟁으로 지구에 방사능이 쌓여서 종말이 오든, 기후위기로 인간이 살 수 없어서 멸종한다고 해서 지구가 종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지요? 지구는 계속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종말일 뿐이지요. 지구는 몇 억년이 지나면 다시 자연 본래의 모습과 생명력의 가이아(지구의 여신)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인간 종이 망한다고 해서 지구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사과나무를 심는 처절한 행위는 인류의 다음 세계를 인간이 아닌 식물에 위탁하는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 열매, 사과나무 뿌리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 균근 네트워크와 함께하는 곰팡이(균류) 미생물은 지구가 다시 적절한 생태환경을 갖추기까지  매우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비인간의 존재들입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 대립점에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물질)을 이원론으로 바라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명제처럼 생각(cogito)이 존재의 원인이 됩니다. 정신은 신적 지성을 이어받아 존재(육체, 물체)를 지배합니다. 육체는 정신의 하위체계입니다. 자연이라는 물체도 정신의 지배를 받습니다. 덕분에 정신이 자연을 장악하고 해체하고 개발하는 과학적 지식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기술문명이 이뤄졌습니다. 데카르트의 이성 우위와 인간 오만이 자연과 물질을 수단으로만 여기면서 생태계를 파괴했습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육체를 동일선상에서 동등하게 바라보는 일원론에 서있습니다. 스피노자의 명제는 ‘신 즉 자연’입니다. 신은 곧 자연입니다. 신과 필연적으로 자연과 동시에 함께 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신 다음에 자연’이 아닙니다. 신이 조물주로서 계시다가 그 다음에 자연과 세계를 창조했다면 처음부터 신은 무언인가 아직도 못다 이룬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은 완벽하고 무한한데 아직 다하지 못한 결여상태가 있었다는 것은 신 스스로가 불완전한 존재임을 증명한 것이나 같습니다.      


스피노자에게 모든 존재는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신의 변용입니다. 신의 역량을 나눠 갖고 변용된 양태들입니다. 온갖 삼라만상은 존재는 신의 모습이 깃들어 있다고 해서 범신론이라고도 불립니다. 스피노자를 이어받은 신유물론은 이것을 ‘활력있는 물질’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자연과 사물에 깃들어 있는 ‘신의 변용이라는 성스러움과 활력’을 제거하여 영혼 없는 사물과 기계로 만드는데서 시작합니다. 단순한 사물화(thingfication) 이후에야 계산하고 화폐로 교환되는 수요와 공급의 시장경제 메카니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탈성장의 경제학도 스피노자의 사과철학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서론이 장황했습니다. 죽음의 한계와 유한자의 끝을 뚜렷하게 인식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 있습니다. 무한성장에서 벗어나 ‘경제성장 없이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데굴데굴 사과처럼 비탈길을 굴러 나가서 새로운 세계로 탈주해야 합니다.      


90분의 특강과 질의응답으로 밖은 어둑해지고 있었다. 진주에 유명한 음식점이 많지만 이모 마음대로 안주를 만들어 내놓는 일명 ‘이모카세’에 저녁을 예약하였다. 너와 내가, 내가 너와 어우러지는 이야기와 음식 속에서 진주 남강의 추억도 깊어만 간다. 그런데 너무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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