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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Mar 09. 2024

시골집과 작별인사

인생에는 무엇보다 잘 이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3월 7일 시골집 이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작년 2월 7일에 계약을 하고 들어왔는데 1년이 하루처럼 지나갔다. 계약서대로 따지면 2월 7일에 계약이 종료되므로 나가야 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한 달 뒤에 나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한 달을 더 살았다. 시골집은 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키고 문수산으로 달려와서 산을 타고 와서 도시락을 먹거나 쉬는 거처로 사용했다. 가끔 주말에 아이가 친정에 가면 달려와서 하룻밤 자고 가는 개인 산장처럼 다녔다. 본가에서 40분 내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어서 좋았고 문수산 품에 안길 수 있어서 좋았다. 살림을 하지 않고 사무실처럼 썼기에 딱히 이삿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꺼내고 보니 은근히 짐이 많았다. 그동안 하나, 둘씩 차에 실어서 가져왔던 살림살이들이 쌓였던 것이었다. 


나는 4일간 나눠서 조금씩 짐들을 차에 실어서 날랐다. 시골집과의 이별은 늘 마음 한편에 준비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할머니와 쌓은 우정과 추억들이 곳곳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담갔던 고추장 항아리도 한번 더 쓰다듬어보게 되었다. 개복숭아 발효액을 담근 항아리도 품에 안아보게 되었다. 

싱크대 살림살이들을 모두 꺼내서 정리하는데 창가 쪽 틀에 길고 큰 대주걱이 놓여있었다. 

그동안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대주걱이었다. 이 주걱은 할머니랑 함께 개복숭아 발효액과 고추장을 휘저을 때 요긴하게 썼다. 커다란 주걱을 볼에 대보니 이별의 순간이 실감되어 더욱 아련했다.

'주걱은 놓고 가야겠다.' 

대주걱은 집에 가져가봐야 딱히 쓸 일이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담가두었던 개복숭아 발효액을 한 번씩 휘저어줄 때나 빛을 발하기에 이곳이 이 주걱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나는 할머니네 꽃밭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나무들과 꽃들에게도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나는 애정 어린 눈길로 그동안 할머니의 사랑을 머금고 자라난 꽃과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병꽃나무, 이팝나무, 매실나무, 앵두나무, 홍매화, 황매화, 접시꽃, 장미꽃, 수선화, 꽃무릇, 수국, 두릅나무, 뽕나무, 대추나무, 감나무, 돌단풍, 밤나무, 취나물, 무화과나무, 금낭화, 달맞이꽃, 튤립, 레몬나무, 장미 조팝꽃, 군주란, 문주란, 말굽다육, 원숭이꼬리, 알로에 등등의 모든 꽃과 식물들에게 많이 그리울 거라고 속삭였다.

시골집에 이사 온 내게 이 꽃과 식물들은 말없이 형형색색의 빛깔로 나의 치병의 길에 아낌없는 응원과 위로를 보내주었다. 나는 이 친구들의 기운을 받고 씩씩하게 그 길을 걸어갔고 점차적으로 건강도 회복되었다. 


닭장으로 가서 닭들에게도 작별 인사를 나눴다. 

"꼬꼬들아!잘 있어. 이 쌀은 작별 선물이야. 묵은 쌀이지만 맛은 괜찮을거야. 올 해에도 알 많이 낳고 건강하게 잘 지내.안녕!" 


마지막 이사 하는 날, 오랜만에 산악인을 만났다.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산을 탔다. 이 산악인은 타고나길 선천적으로 모험심이 많고 여전사 같은 기질이 있었지만 젊은 시절 남편과 맞춰 사느라 자신의 기질과 성향을 잘 펼치지 못한 것 같았다. 내일모레 70인 나이임에도 산을 날다람쥐처럼 날아다녔다. 정력이 넘치고 목소리도 짱짱하고 표정도 밝고 명랑했다. 내가 봐왔던 그 연배의 전형적인 일반 아주머니들과는 많이 달랐다. 

산을 정말 사랑하고 길이 아닌 길도 그냥 터벅터벅 헤쳐가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종횡무진했다.

그 덕에 지난여름 나는 문수산의 골짜기들을 이 산악인과 함께 누비며 그 속에서 물아일체의 신비를 체감했다. 산악인과 전망대에서 홍예문을 지나서 문수사로 내려와 다시 장대 2번까지 갔다가 김밥을 먹고 김포대학 방면으로 하산했다. 


산악인께서 김포대학 아래에 찻집에서 대추차를 사준다고 하셨다. 산악인님도 이 집에는 처음 와본다고 하셨는데 아기자기한 찻집이 참 예뻤다. 노란 몽우리가 데롱데롱한 개나리 가지를 꺾어서 화병에 꽂아 두었는데 너무나 예뻤다. 어디에 앉을까 고민하다가 멋진 우드테이블에 앉기로 했다.

나는 대추차를 시키고 산악인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찻집 한쪽에는 주인장께서 직접 손뜨개로 뜬 모자, 목도리, 니트 등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여쭤보니 아주머니께서 손뜨개 강의도 나가시고 주문 제작도 하시고 판매도 하고 계셨다.

빨간색 모자와 목도리가 일체형으로 된 손뜨개 모자가 눈에 띄었다.

"이거 써봐도 되나요?"

"그럼요."

나는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았다. 모자 자체는 디자인과 색감도 너무 예쁜데 내 얼굴이 햇빛에 너무 타서

내가 쓰니 네팔 산마을 소녀 같았다. 

'피부가 하얀 분들이 쓰면 정말 예쁘겠다.'

이번에는 히잡같이 생긴 회색 모자를 써봤다.

"어머! 이거 너무 괜찮다. 원단도 너무 좋고, 눈만 뚫려있어서 겨울에 스키 타거나 산행할 때 딱인데요? 이모님~이거 얼마예요?"

"그것도 원래 15만 원인데 십만 원에 드릴게요."

"아~! 수제라서 비싸군요."

"다 손으로 떠서 만든 수제라서요."

이것저것 써보다가 금색 실로 뜬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써보았다. 

"이건 아랍공주 느낌인데? 어머. 이거 나랑 잘 어울리네? 이건 얼마예요?"

"그건 3만 원이에요. 백화점에서 십만 원씩 팔아. 마트 가거나 슈퍼 갈 때 멋스럽게 쓰고 가는 거예요."

나는 이것저것 구경하고 써보다가 제자리에 내려놓고 

"다음에 와서 이건 꼭 사갈게요. 저희 큰 이모가 진짜 좋아하실 것 같아요."

의외로 이 아랍스타일 모자가 나와 잘 어울렸지만 아직 이런 스타일의 모자를 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대추차가 나와서 대추차를 마셔보았더니 달큼하고 따뜻하니 너무 맛있었다. 

"여기 맛집이네요? 자주 와야겠어요."

우리는 차를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알고 보니 주인장 아주머니도 유방암 수술과 방사선 치료 이력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대추차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사연을 꺼내놓으며 치병의 흔적들을 나눴다. 주인장 아주머니께서는 따뜻한 식혜와 쿠키를 서비스로 주셨다. 너그러우신 주인장님 인품에 반하여 자주 오고 싶어졌다. 


아이 픽업 시간이 늦어지지 않게 찻집에서 후다닥 나와서 시골집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악인은 가는 길에 걸포동에 내려드리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아이 하원 시간에 맞춰서 집에 돌아왔다.

유치원 셔틀버스가 깜빡이를 켜고 정류장에 서 있었다.

아이와 키즈카페로 가서 신나게 놀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피곤했는지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나는 시골집과 작별을 했다.

그리움이 고여서 찰랑거릴 때 호두과자 한 봉지 사들고 할머니를 보러 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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