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으로 쏟아지는 눈에 시선을 뗄 수 없다. 차 없이 눈과 바람을 뚫고 집에 갈 일이 걱정되었지만 겨울을 제대로 누리는 맛이 좋다. 사람들이 잠바를 챙겨 입길래 나도 주섬주섬 일어섰다. 올 한 해 수고했다는 식상한 인사를 나누었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눈이 멈췄다. 나와 아들이 안전하게 집에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 마냥. 좀 걷겠냐고 물으니 큰길까지만 걷고 택시를 타자고 한다. 큰길에 이르기 전에 하늘이 맑아져 해가 기운을 땅으로 쏟는다. 택시를 부르지 않고 계속 걸었다.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봤다. 유달산 쪽으로는 먹구름이 잔뜩 둘렀다. 영암 쪽 하늘도 까맣다. 우리 두 사람 위 하늘만 아주아주 맑고 새파랗다. 공기는 차갑고 상쾌하다. 아들이 오랜만에 재잘거린다다. 아까 먹은 채식뷔페에 생각보다 먹을 게 많았다고 했고, 피아노로 군악대 가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잘도 조잘거린다. 다음 주부터는 트롬본 연습을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도 한다. 금방 집에 왔다.
푹 자고 싶어서 브레이저를 벗어버리고 늘어질 대로 늘어진 면원피스를 찾아 입었다. <스토너>를 들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세 장을 넘기 전에 잠들었다. 어렴풋 정신이 들어서는 이렇게 정신없이 자도 되는지 걱정이 되었다. 냉장고에 귤과 사과가 잔뜩이고 갈치도 있어 저녁 반찬과 아이들 먹을 것 걱정이 없으니 미소가 지어졌다. 아까 누가 홍시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주머니에 그걸 사 줄 수 있는 만 원도 있으니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어 나는 또 깊은 잠에 빠졌다. 조심스럽게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깼다. 배가 고프구나. 무얼 먹고 싶냐고 물으니 '너구리'라고 한다. 모두 일 보러 나가고 먹을 사람이 나랑 지명이뿐이라 두 개만 끓였다. 아이 것은 넓은 냉면 대접에 내 것은 국그릇에 담았다. 식탁에 앉으며 "엄마 것 양이 너무 적은 거 아니에요?"라고 한다. 자기 것이 많고 남의 것이 적은 걸 볼 줄 아는 사람이면, 이만하면 잘 큰 것이지. 더이상 바라지 말자. <놀면 뭐 하니?>가 실컷 보고 다시 <스토너>를 챙겨 이불로 들어갔다. 스토너 교수가 병에 걸렸다. 책을 배에 올리고 슬픔을 만끽했다. 그리고 또 잠에 들어 갔다. 찬 기운에 몸에 닿아 눈을 떴다. 아, 내 사랑이구나. 내 목 밑으로 팔을 깊이 넣는다.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내 몸에 자기를 의지하여 잠이 든다.
일요일.
예배 전 기도에 오늘 대표 기도자인 염 집사님이 나오지 않고 문 장로님이 앞에서 서, 같이 기도할 제목을 일어 주었다. 첫째, 오늘 예배를 위해둘째, 자기 자신을 위해 셋째, 강설을 하는 목사를 위해 넷째, 기도자 및 봉사자를 위해 다섯째,예배 참석자, 참석하지 못한 자를 위해 여섯째,전도 대상자를 위해. "그리고 오늘은 기도 제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안 공항에 비행기 추락 사고가 있는데 생명들이 보전되고 잘 수습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눈을 짧게 감았다 뜨고다음 앱을 눌렀다. 속보가 뉴스면 가득이다. 소방관인 염 집사님, 아린 아빠, 예서 아빠가 예배에 나오지 못했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눈물은 흐르는지. 삶이란 게 이렇게 위태하고 아슬아슬한 것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무엇을 믿고 이토록 평온하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