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의 허무함
약 9개월 간의 백수 기간이 다음 주면 끝이 난다. 지난 두 달간 틈틈이 준비하고 있던 취업을 해내고 말았다. 그런데 기분이 마냥 좋지 않다. 묘하다. 사실 우울하다.
난 꼭 이렇다. 대학 합격, 취업, 이직 등 크다고 할 수 있는 인생의 성취를 이뤘을 때도 크게 기쁘지 않았고, 지금도 기쁘지 않다. 차라리 허무한 느낌이 더 크다.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즐거워하고 싶을 때, 그렇게 즐겁지 않고 기쁘고 싶을 때 기쁘지 않다.
내 기질 자체가 뭔가를 기대하고 앞날을 꿈꾸는 그런 긍정적인 편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관론자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데 뭔가를 이뤄내도 돌아오는 건 허무함과 공허함 뿐이라니. 성취하면 누릴 수 있는 응당한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성격이라는 게 싫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렇다. 매우 기쁘거나 기대가 고조되어서 내 새로운 시작을 창대하게 맞이하고 싶은데, 지금의 나는 축 처져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시작도 안 해봤는데 번아웃이 와버렸다.
"나는 왜 기뻐하질 못하는가? 왜 이 순간을 즐기질 못하는 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려 하니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다시 일하는 게 너무 싫은 걸까? 더 이상 백수가 아닌 것이 슬픈 것일까? 첫 이직에 부담감이 느껴지는 걸까? 성취에 대한 기쁨보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 걸까? 알 수가 없다. 아직까지도 나에 대해 모르겠다. 그냥 공허함만 느껴지고 힘이 안 나서 누워만 있게 됐다.
그런데 누워만 있는 그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아까웠다. 백수가 며칠이나 남았다고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뭘 새로운 걸 할 힘은 안 났다. 그래서 그냥 원래 루틴대로 행동해 봤다. 지난 9개월 동안 만족스럽고 즐거운 백수 시간이 될 수 있게 한 루틴의 힘을 믿어봤다. 시간 되면 밥 먹고, 운동하고, 책 읽고, 작업하고... 그걸 반복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포인트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는 것. 생각 없이 정해진 루틴을 도장 깨기 하다 보니, 작고 작은 성취들이 저절로 모였다.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야망이 없는 사람이다. 성실하지만 큰 노력에서 비롯된 큰 성취보다 작은 노력과 일상에서 얻은 소소한 성취에 더 행복함을 느낀다. 노력과 품이 드는 성취에는 공허함을 더 느낀다. 효율충으로서 내 성과가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돼서 그런 것 같다. 노력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작고 소중한 행복이 더 중요한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앞으로 일을 열심히 안 하거나 커리어에 대해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일, 업무에 대한 성취보다는 내 일상과 삶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줄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행복을 지킬 수 있도록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잘 시작해보겠다! 다시 한 번 행복을 알려준 나의 백수시대에게 작별을 고하며, 고맙다고도 말해주고 싶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