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이영순 Jan 27. 2024

밥부터 먹자

일미칠근(一米七斤)

   교회 식당봉사를 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옷매무시를 다듬는데 쌀 몇 톨이 떨어졌다. 무슨 대단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허리를 구부렸다. 이까짓 것이 무어라고 주운 것을 손바닥우물에 올려놓았다. 본능적으로 줍긴 했지만 다시 버리기도, 그렇다고 간수하기도 애매한 쌀 톨을 쥐고 있으려니 손바닥에 땀이 찬다. 함께 식당봉사를 했던 친구가 내 옆구리를 쿡 치며 ‘넣어둬 넣어둬’ 하면서 웃는다. 


  우스갯소리처럼 던진 말이기는 하지만 친구가 내 입장이 되었어도 똑같이 행동 했을 것이기에 나 또한 쌀독에 쌀이 떨어졌다며 주운 것을 윗옷 주머니에 넣었다. 열댓 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 논두렁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뜬금없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꽃이 어떤 꽃인지 아느냐고 물으셨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 아버지는 그렇게 질문 하나를 툭 던져놓고 묵묵히 걷기만 하시더니 논두렁 끝머리쯤에 쪼그려 앉으셨다.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느니라. 쌀 한 톨은 곧 땀 일곱 근이라는 말이다. 일곱 근의 땀을 바치고서야 쌀 한 톨을 얻을 수 있으니 벼꽃 하나의 무게도 그만하지 않겠니. 그러니 우리가 먹는 밥 한 숟가락의 무게가 얼마쯤 될지는 똑똑한 네가 더 잘 알겠구나. 아무리 땀 흘려 농사를 지어도 안살림을 하는 여자들의 손끝이 야물지 못하면 쌀독은 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법이다.”


  아버지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그곳에는 자마구(벼꽃)가 허옇게 말라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즈음에 있었던 작은 소동이 눈앞을 스쳐갔다. 꽁보리밥이지만 끼니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통일벼라는 품종이 농가에 보급되면서 쌀 풍년이 났다. 이제 쌀밥은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 식구들이 남긴 밥이며, 솥에서 묻어 나온 밥풀이 구정물통으로 예사로 버려졌다. 도회지 생활을 하다가 갓 시집온 새언니가 식구들이 먹다 남긴 밥을 구정물통에 주저 없이 버리는 것을 아버지께서 보신 모양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내저었지만 밥은 이미 언니의 손을 떠난 후였다. 소매를 걷으신 아버지가 구정물통에 손을 넣자 허옇게 불은 밥 알갱이들이 몸을 뒤집으며 떠올랐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다. 끙.”


  아버지의 신음소리 같은 한마디는 깊은 메아리가 되어 집안을 울렸다. 자식들 줄줄이 뒤딸린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보릿고개를 넘어오신 아버지로선 쌀은 곧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런 밥을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다고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버리다니. 이 얼마나 하늘 무서운 일인가. 아버지는 하늘을 내세워 우리를 훈계하셨지만 나는 그 순간의 아버지 표정이 하늘보다 더 무서웠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라 아버지의 일미칠근이라는 말씀이 귓속으로 쏙 파고들었다.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밥알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잔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고 부엌일을 거드는 딸에게 속엣말을 털어놓으시는 아버지의 표정도 밝지만은 않았다. 

  그랬던 것이 꼭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0여 년 전의 추억이 되어 가물거린다. 하지만 쌀을 생명처럼 여기던 아버지께서 쉰아홉 해의 삶을 접으시며 하신 말씀은 아직도 내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울림으로 남아 있다. 


  “하얀 쌀밥에 김치 한 가닥 걸쳐서 먹으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버지는 밥 한 숟가락에 실리는 무게쯤이면 그 몹쓸 놈의 병마에서 풀려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듯했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몸은 이미 물 한 방울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죽정이 같이 말라 있었다. 끼니 걱정은커녕 오히려 배부르게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밥이 대우 받지 못해서인지 생명까지도 경시받고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지금의 이 세태를 무엇에 빗대어 훈계하셨을까. 쌀 몇 톨을 두고 온갖 상념들을 다 떠올린다. 


  내게는 ‘밥부터 먹자’란 말을 곧잘 하는 만난 지 이십 년 가까이 되는 친구가 있다. 저나 나나 오십보백보인 처지로 사는 친구는 밥이 곧 힘인데 우리가 믿을 게 밥심 밖에 뭐가 또 있냐며 때를 따지지 않고 밥부터 먹길 권한다. 

  반면 ‘밥이나 먹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똑같이 먹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인데도 ‘밥이나 먹자’란 말에는 힘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마뜩치 않을 때 선택의 여지없이 내뱉는 말이 ‘밥이나 먹자’다. 이런 경우의 밥은 힘이 아니라 권태다. 그러기에 밥은 먹는 태도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과연 쌀 한 톨의 값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인가. 밥 한 숟가락에 실린 무게를 제대로 알고 살아온 것인가 내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다.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