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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이영순 Jan 07. 2024

초롱꽃 신방

초롱꽃을 흔든 건 바람이 아니었다

   초롱꽃 한 송이가 바람에 스치듯 흔들린다. 마당 화분에서 초롱꽃이 꽃잎을 부풀리기 시작한 지 이레 정도 지났다. 몇 년 전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다가 초롱꽃과 마주쳤는데 도저히 그냥 발길을 돌려 올 수가 없었다. 바쁜 주인을 졸라서 모종 한 포기를 얻어와 심은 것이 제법 포기수를 늘려 2-3년 전부터는 내 집 안에서도 초롱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상아색 통꽃 바탕에 진자줏빛 반점이 촘촘히 박혀있는 초롱꽃은 어스름 저녁 무렵이면 환상적인 자태를 연출해 낸다.등롱꾼을 꽃가지가 휘청할 정도로 매달려있는 꽃송이 하나하나 그 자체가 등불이 된다. 가지 하나를 뚝 따서 처마 밑에 내걸면 금방이라도 마당이 환한 불빛으로 가득 찰 것만 같다. 다시 한 가지를 꺾어 손에 들면 등롱꾼을 앞세워 밤 마중을 나가시는 어머니의 치마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어느 작가는 초롱꽃을 일러 가장 한국적인 꽃빛을 가진 꽃이라고도 했는데 그만큼 꽃의 모양새나 빛깔이 우리 정서와 어울린다는 표현일 것이다. 나는 초롱꽃 망울이 부풀어 오르면 식구들이 들고나는 자리 가까이로 화분을 옮겨놓는다. 

  그런가 하면오르가슴을그런가하면 낮에 보는 초롱꽃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수줍은 듯 다소곳하니 밑으로 처져서 피는 모습이 항아리치마를 입은 여인을 떠올리게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속내를 숨긴 새침데기처럼 보일 때도 있다. 초롱 속은 어떤 모습일까. 얼굴을 최대한 꽃가지 아래로 밀어 넣어 가자미눈을 하고 초롱 속을 훔쳐보았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꽃. 초롱꽃 한 송이가 꿀벌의 애무를 받으며 절정의 순간을 맞고 있다. 꿀벌은 내가 훔쳐본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더 적극적으로 꽃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하고 다닌다. 그랬구나. 초롱을 흔든 것은 바람이 아니었구나. 욕심을 채운 꿀벌이 초롱꽃의 면전에서 매무새를 다듬는다. 조금 전의 흔적을 지우듯 몸에 묻은 꽃가루를 능수능란하게 훑어서는 자랑처럼 양 겨드랑이에 껴 찬다. 


  관음증 환자가그냥 꽃송이를 손으로 들추고 들여다봐도 될 것을 내 딴에는 예의를 차린답시고 뱃살까지 접어가며 그런 모양새를 취한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관음증환자가 되고 만 꼴이다.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혼자 웃는다. 밀애의 장면을 들키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다른 꽃을 찾아들어가는 꿀벌이나 그 격렬한 떨림을 태연히 숨기고 있는 꽃에게 아무래도 내가 농락당한 느낌이 든다. 


  수 놓인화풀이를 하듯 꽃가지를 채어 잡고 초롱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까 그 난데없는 현장을 훔쳐보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촘촘하게 수놓인 자주색무늬와 흰 솜털, 암술을 떠받치고 있는 다섯 개의 수술, 그리고 세 갈래의 머리를 가진 암술의 모습이 방금 전의 그 격렬했던 현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늑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초롱꽃은 암술과 수술의 성장 속도가 다르다고 한다. 다섯 개의 수술은 꽃잎이 열림과 동시에 이미 총각으로 성숙되어 나오지만 암술은 아직 미성숙 단계에서 총각들의 애간장을 끓게 한다. 이제나저제나 혼인할 시간만을 애태우며 기다리다가 수술들은 생을 마감하는데 그때서야 마치 신랑감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암술은 수술의 시체 더미를 뚫고 나온다. 


  통꽃인 데다가수술과 암술의 어긋난 만남은 자가수분을 피하려는 초롱꽃의 본성이다. 통꽃인데다가 아래로 처져서 피는 초롱이 자가수분을 피할 방법은 오직 곤충들을 이용하는 길 밖에는 없다. 암술은 자신을 최대한 매혹적으로 꾸며 꿀벌을 유혹해야 한다. 그것이 암술의 숙명이다. 꿀벌에게 얼마간의 수고비를 지불하고 자신의 꽃가루를 이웃 꽃에게 전해주는 이 행위는 근친교배를 피하여 열성 종자나 돌연변이를 막으려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세 갈래의 머리를 가진 암술의 자태가 매혹적이다. 


  꿀벌은 초롱꽃을 들락거릴 때마다 거간비로 받은 꽃가루를 초롱의 면전에서 공중곡예를 하듯 굴리기를 한다. 겨드랑이에 낀 꽃가루 뭉치를 놓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지켜보기 조마조마하지만 꿀벌의 종아리마디에는 꽃가루를 담을 수 있는 바구니가 있다고 하니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성싶다. 꿀벌은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초롱꽃을 들락거리며 거간비를 챙겼다. 아무래도 꿀벌이 수지맞는 장사를 하는 것 같다. 


  간밤에 장맛비가 지나가고 날이 잠깐 개었다. 마당의 화초들이 빗방울에 눌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초롱꽃 가지를 누르고 있는 빗방울을 털어주려고 꽃가지를 흔들었다. 꿀벌 한 마리가 꽁무니를 빼고 날아오른다. 정말 밤새 초롱꽃과 밀회라도 즐긴 것일까. 아니면 그야말로 유충들의 먹이 공급을 위해 날이 개이기 무섭게 꿀과 꽃가루를 챙기려고 온 것일까. 나는 설령 이것이 꿀벌의 일탈이라고 해도 눈감아 주련다. 

벌이 날아간 지붕 위로 시선을 옮겨본다. 올 가을엔 분명 튼실한 초롱꽃 꽃씨를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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