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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담 Jan 22. 2024

인생의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

최근에 책에서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구절이 있다. 권여선 작가님의 '각각의 계절'에 수록된 첫 단편, '사슴벌레식 문답'에 나오는 문답이 그랬다.


작중 '정원'이라는 인물은 '나'를 포함한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 숙소에 묵으며 비질을 하는데, 그러다 어디에서 들어왔는지 모를 커다란 사슴벌레를 발견하게 된다.


"방충망도 있는데 도대체 그렇게 커다란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는 거예요?"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이 '어디로든 들어와'라는, 자칫 무성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대답을 작가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인생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겪게 되는 '나'의 생각을 통해 전달된다.


처음에 '나'와 '정원'은 어떠한 질문을 받더라도 대답할 수 있는 비기와 같은 이 문답을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부르고, 이 문답을 이용해 말장난처럼 대화하기도 한다.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
"너는 어떤 소설을 쓸 거야?"
"나는 어떤 소설이든 쓸 거야."


'든'이라는 마법 같은 한 글자로 어떠한 질문에도 꼿꼿한 자세로 의연하게 대답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은 이 문답은, 소설의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는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소설의 후반부에 접어들면 이미 당도한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나'는 또 이렇게 생각을 바꾼다.


그것은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어디로든 들어는 왔는데 어디로 들어왔는지 특정할 수가 없고 그래서 빠져나갈 길도 없다는 막막한 절망의 표현인지도.




총 일곱 편의 단편 중 이 '사슴벌레식 문답'이 맨앞에 실려 있던 탓에 문답에 대한 강렬한 감각을 씻지 못한 채 뒤이은 단편들을 읽어나갔던 것 같다. 소설 속 은유와 정교한 장치를 나로서는 다 모르겠지만, 왜 작년 한 해 그토록 사랑받았는지는 충분히 알 것 같은 단편집이었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인생이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어딘가 데려놓을 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다양한 반응을 문학적으로 풀어놓는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예감했든, 하지 못 했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의젓하게 긍정할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체념할 것인가?


작중 '나'는 처음에는 의젓하게 긍정했다가, 본인이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을 겪으면서 그 사실에 분노하고, 결국 체념한다. 인생은 우리가 반기는 일들만 찾아오지 않는다. 이해 가능하고 납득 가능한 일들만 일어나지도 않는다.




'나한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그러나 나도 분명 겪게 되겠지. 그게 누군가의 죽음이 됐든, 배신이 됐든. 내가 대단한 인격자도 아니고, 그런 순간에 분노하거나 체념하지 않을 자신은 없다.


다만 그러한 과정이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라면 차라리 빨리 겪어서 빨리 빠져나오고 싶다. 그래서 결국에는 의젓한 사슴벌레처럼 '그런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 하고 인정하고 싶다.


그리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어떻게든 일어났으니까, 나는 이렇게 해볼게' 라며 침착히 다음 스텝을 밟아나는 것까지가 진정으로 '의젓한' 사슴벌레식 문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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