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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률 Feb 05. 2024

[영화 리뷰] 노 베어스(2022)

멈춰서는 용기

1

 <노 베어스>의 감독 '자파르 파나히'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다. 이란의 영화감독인 파나히는 반체제적 영화를 만든다는 이유로 20여 년이 넘게 이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왔다. 가택 연금과 출국 금지, 심지어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제작하는 것조차 금지된 상태다. 그럼에도 그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영화 활동을 이어갔고, 2022년 <노 베어스>를 발표했다. 이후 그는 시위에 참여하다 투옥되었고, 석방된 지금도 여전히 출국 금지인 상태다.


2

 자파르 파나히는 작중의 본인을 연기한다. 그는 튀르키예에서 프랑스로 망명하려는 두 연인 '자라(미나 카바니)'와 '박티아르(박티아르 판제이)'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원격으로 만든다. 촬영지로부터 2km 떨어진 작은 국경 마을에 머물며 파나히는 촬영된 영상을 검토, 수정하는 일을 반복한다. 카메라 한 대가 상하좌우로 영상 정보를 긁어모으면, 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통해 연출을 지시한다. 악조건 속에서 제작이 진행될 수 있는 건 조감독 '레자(레자 헤이다리)'의 헌신적인 중개 덕이다.


 그럼에도 파나히는 외주화 된 제작 환경이 익숙해진 듯 거리끼지 않고 창작의 자유를 누린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음에도 그는 등장인물에게 감정을 절제하라거나 팔을 어떻게 들라거나 하는 식으로 있는 그대로보다 변형된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다. 레자에게는 박티아르와 밀수꾼이 공모하는 순간을 찍어오라 지시하며 촬영 현장에 위험을 감수시킨다. 그의 다소 오만한 성정은 집주인 '간바르(바히드 모바세리)'에게 약혼식을 찍어오라며 카메라를 강권하듯 들려 보내는 장면에서 징후를 보인 바 있다.


© 2022. JP Production

 

 그렇게 촬영을 이어가던 어느 날, 파나히의 숙소로 마을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파나히가 취미로 찍고 있는 마을 사진을 언급하며 만남이 허락되지 않은 젊은 남녀 '고잘(다르야 알레이)'과 '솔두즈(아미르 다바히)'의 밀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달라 요구한다. 카메라를 확인한 파나히는 사진이 없음을 거듭 주장하지만, 점점 마을을 뒤흔드는 사건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외지인이자 지식인인 파나히에게 전통과 미신에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여성이 태어나면 약혼할 남성의 이름으로 탯줄을 자르는 관습도, 약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자리가 바뀌면 안 된다는 고집도 이해하기 어렵다. 존재하지도 않는 곰을 가지고 국경에 가까이 못 가게 겁주는 미신의 소통 방식도 마찬가지이며 주변의 시선을 최우선시하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 준칙 또한 마뜩잖다.


 그렇기에 파나히는 '맹세'의 방에 카메라를 들고 가 영상 증거의 효력을 설명하며 미신 사회를 계몽하려 한다. '피고'와 '원고'라는 법절차적 용어가 통용되는 방 안에서 파나히는 승산이 있다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고잘의 약혼자 '야굽(자바드 시야히)'의 방해로 촬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빈번히 활용되는 심도 깊은 롱쇼트는 부조리를 관습으로 체화해 버린 마을 군중들의 낯선 얼굴에 초점 맞추며 앞선 시도가 무망한 도전이었음을 재확인한다.


 이처럼 영화는 튀르키예와 이란에서 일어나는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며 진행된다. 만일 튀르키예를 파나히가 예술 활동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창작의 세계로 본다면, 부조리의 공기에 갇힌 이란의 공동체는 현실의 파나히가 비판해 온 비이성과 차별의 세계를 은유한다. 그리고 두 공간에서 파나히는 예술가이자 관찰자로서, 맡은 역할을 함부로 이행한다.  


© 2022. JP Production


3

 행방불명되었던 자라는 해변가에서 주검이 되어 발견된다. 그녀가 자살한 일차적인 원인은 박티아르와의 망명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연출은 자라를 치명적인 상태로 밀어낸 주동자가 파나히라는 사실을 은밀히 고발한다.


 "사실만 말한다더니 이게 뭐예요." 자라가 책망한 대로, 파나히는 진실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그녀에게 가짜 감정을 요구했다. 그는 투옥도 고문도 견뎌낸 자라의 강인함을 탐구하는 대신 박티아르가 거리에서 부린 난동의 스펙터클에 주목했다. 그의 준비된 망원 렌즈는 자라의 손목을 가리는 팔찌가 아닌 만취해 채 구토하는 박티아르의 거구를 초점 잡는 데 남용되었다. 해변가의 저녁, 노래를 부른 뒤 감정에 복받쳐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나는 자라를 그는 따라가지 않았다. 카메라는 파나히에게 할 말이 있다는 박티아르를 이어서 쫓을 뿐, 그 뒤로 넘실대는 검은 바다가 자라가 걸어 들어갈 장소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튀르키예에서의 이야기는 주검이 된 자라의 얼굴을 향해 함부로 줌을 당기려는 카메라와, 그보다 간신히 먼저 '컷'을 외치는 파나히의 목소리로 마무리된다. 간바르의 영상을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나머지로 분류했던 파나히의 단호함을 떠올릴 때, 이 장면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안다고 믿었던 예술가의 전능감을 허위로 되돌리는 한편, 보지 '않을' 의지가 수반되지 않을 때 카메라가 어떻게 소재의 자성에 이끌리는 지를 요약해 보여준다.


© 2022. JP Production


 촬영이 중단되고 파나히가 마을을 떠나는 날. 고잘과 솔두즈는 국경을 넘다 사살당해 시체가 되어 돌아온다. 영화는 예외적일 정도로 선연한 둘의 피로 물든 시체를 국경 마을의 황량한 후경 안에 점찍는다. 파나히는 주검에 가까이 가기 위해 차에서 내리려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 한다는 간바르에 의해 다시 밀어 넣어진다. 다시 한번 사건의 수습에서 면제된 파나히에게 한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 그는 왜 자라와 박티아르의 파멸을 지켜보고도 똑같이 도망길에 오르는 고잘과 솔두즈의 위험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마도 그는 국경을 넘는 행위가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국경을) 넘어가기 정말 쉽죠?"라며 젠체하던 조감독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너무도 쉽게 밟은 국경선 위에서 허탈감을 느꼈던 그의 경험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필요한 튼튼한 차와 감독으로서의 명망, 약간의 사람 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시켰다. 파나히는 돌아가는 길에서 사진을 보여주지 말아 달라며 간곡히 부탁하는 고잘을 만났지만, 고잘의 절박함이 추동한 탐구심은 마을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는 청춘이 아닌 관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매한 다수로 향했다. 계몽을 위한 그의 의협심은 정말로 보았어야 했던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국경에서 무사히 돌아왔냐는 국경수비대의 의심이 닿는 순간까지도 파나히는 어르신에게 한가로이 마그네슘을 처방했다. 도망치기 위해 국경선을 넘을 줄 몰랐기 때문일까? "도시는 부패가 문제고, 시골은 미신이 문제죠"라는 마을 노인의 한탄은 이란 어디에도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는 말과 진배없다.


 파나히를 둘러싼 모든 상황은 비극으로 종결된다.


4

 파나히를 주어로 둘 때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은 현실의 파나히인가 작중의 파나히인가. 감독이 극 영화 안에서 관찰자를 자처할 때 발생하는 현실과 가상의 모호함은 비단 <노 베어스>만의 개성은 아닐 테다. 이란의 남성 중심 사회의 퇴행성과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단단한 은유와 호소력 있는 필치로 그려낸 그의 직전 작품 <세 개의 얼굴들> 또한 같은 구조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작가적 도돌이표가 아니다. 자파르 파나히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문지르는 다층적 화법의 원숙함과,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각 층위들을 물에 녹이듯 결합하는 마술 같은 편집을 통해 '극적'이면서 '사실적'인, 이 불가해한 형용이 영화 예술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해 보였다. 나아가 이 영화는 가장 혁신적이고 투쟁적인 예술가조차 스스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고 고백하는 진솔함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귀하다.


 영화는 자동차를 타고 마을을 빠져나가던 파나히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들어 올리며 끝이 난다. 이란의 거장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으로 영화를 시작한 파나히에게 있어 자동차의 의미는 남다를 것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에서 자동차 안의 공간이 인물 내면의 축소판이라면, 바깥으로 통하는 차창은 세상의 모순과 폭력, 부조리가 일어나는 현실을 최소한으로 가리는 차단막이다. 그리고 키아로스타미는 운전하며 만나는 외부인들을 차에 불러들여 현실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타자로부터 희망을 발견했다. 반면 <노 베어스>에서 파나히의 자동차에는 자살을 하려 하려다 말았다는 노인(<체리 향기>) 같은 '각성'의 모티프나,  <세 개의 얼굴들>의 '자파리(베흐나즈 자파리)'처럼 바깥세상을 대리 체험하는 주체가 보이지 않는다.


© 2022. JP Production


 오히려 파나히의 자동차에는 그를 물리적으로 편안한 방향으로 밀어 넣는 존재들이 접근한다. 차에 탄 레자는 모든 게 준비됐으니 국경을 넘자며 파나히를 부추기며, 간바르는 고잘과 솔두즈가 죽어 돌아오자 그를 차에 밀어 넣어 마을 밖으로 내보낸다. 그러나 파나히는 이러한 유혹을 거부하고 국경을 넘지도, 그대로 마을을 빠져나가지도 않는다. 예술가로서, 관찰자로서 옳은 길을 걸어왔다는 믿음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 제대로 보지 않으면 마주하게 될 실패를 예비해 보는 신중함.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자신조차 타성에 젖어 있었던 게 아닌지 돌이켜보는 용기. 이러한 인식과 감정을 끌어안고 그는 차를 멈춰세운다. 객석을 고양시키는 사이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이 본 것과 보지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한다. 외부의 타자가 가져다준 이야기가 아닌 자신이 공들여 만든 실패담을  자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촉매로 삼았다는 점에서 <노 베어스>의 작업 태도는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앞으로도 파나히는 정보의 지연이 일상인 이란의 험지에서, 곡선의 벽면이 일렁이는 작업실 안에서, 사선으로 기울어진 문턱 위에서 위태롭지만 꿋꿋이 영화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들게 될 강인한 영화들은 이 영화가 멈춰 세운 반성의 순간에 언제나 빚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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