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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3개월 차의 무기력에 대한 고백

잠시 멈춰있는 듯한 시간

by 단새

출퇴근을 시작하고부터 하루가 단순해졌다.


예전에는 불안했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고 가만히 있는 게 뒤처지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콘텐츠를 만들고, 부업을 찾고, 계획을 세우며 바쁘게 움직였다.

완벽한 방향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적어도 멈춰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유튜브를 보고, 게임을 하다가 잠든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나는 사실 취업을 하면 거기서 얻은 안정감을 바탕으로 기존에 하던 일들에 더 박차를 가할 줄 알았다.

출근 후에도 인스타툰을 그리고, 여행 부업을 확장하고, 콘텐츠를 꾸준히 발행하는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다. 출근 이후로는 전에 하던 일들에 신경을 쓰지도 못했고, 여유가 생겨도 쉬는 데 시간을 보낼 뿐이다.


왜일까.


처음에는 바빠서 그런 줄 알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출퇴근이 체력적으로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집에 와서까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금은?

이제는 업무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출퇴근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데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혹시, 나는 그냥 이 안정 속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걸까.


나는 여전히 1년도 안 되는 계약직일 뿐이고 결국 이 안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몇 달간 주어진 소속감과 고정적인 급여, 그리고 2년의 공백기를 끊었다는 안도감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멍하게 만든 건 아닐까.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라지고 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금도 어쩐지 괜찮아 보인다.


새삼 다시금 깨닫는다. 나는 늘 불안을 동력 삼아 살아왔다.

불안하기 때문에 움직였고, 불안하기 때문에 새로운 걸 시도했다.

그런데 지금은 불안이 없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게 편해서. 진심으로 편해서.


그래서인지 요즘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에는 강물처럼 쉼 없이 흘러갔다면, 지금은 고여 있는 저수지 같다. 바람도 없고, 물결도 없다. 잔잔하고, 고요하지만, 뭔가 막혀 있는 듯한 느낌. 편안한데 답답하고, 평온한데 무기력하다.

출근 전의 나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안정된 이후의 내가 이렇게까지 가만히 있을 거라는 걸.


퇴근 후 가끔 인스타툰 폴더를 열어본다. 전에 그리던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펜을 잡으면 다시 이어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폴더를 닫아버린다. 어쩌면, 그때의 불안이 없어서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이 있었고, 그래서 손을 움직였다. 지금은 그 압박이 없다. 꼭 해야 할 이유가 없는 일을, 꼭 해야 할 이유 없이 미뤄둔다.

그렇게 생각이란 걸 하지 않기 시작한 나의 머리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잃어간다.

그림은 결국 부가적인 것이기에 하고 싶은 말을 잃어버린 자에게 콘텐츠는 의미를 잃는다.

나는 점점 생각 없는 사람이 되고, 다시 콘텐츠 소비적인 사람의 자리로 돌아간다.


이건 아무래도 나태한 걸까? 아니면 단순히 긴장의 끈을 놓은 걸까?


지금 상태가 계속된다면 아마 한동안은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지내겠지. 그러다가 계약이 한두 달 남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다음’을 고민할 것 같다. 그때가 되면 갑자기 불안해지겠지.

다시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계약이 끝났으니 가을맞이 여행이나 가버릴까?” 같은 생각을 하며 불안을 흘려보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불안해야만 움직일 수 있는 걸까? 다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야만, 그래야지만 다시 달릴 수 있는 걸까. 불안을 동력 삼아 살아가야 한다면, 지금의 이 안정은 결국 정체일까?




가끔은 예전의 내가 떠오른다. 새벽까지 콘텐츠를 만들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며 바쁘게 움직이던 나.

목표가 확실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 과정이 늘 즐거웠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떤 순간은 무의미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최소한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안정적이지만, 그만큼 생기 없는 것 같다.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까.

원하는 걸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어진 걸까.

나는 예전처럼 다시 움직이게 될까. 아니면, 이런 나에게 익숙해질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흐르지 않는 물이 영원히 멈춰 있지는 않는다는 것.

언젠가는 다시 움직이고 싶어질 것이고, 그때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지금은 그냥 잠시 멈춰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잠시간은 이 평화롭다 못해 적막한 물 위에 떠다니는 사람 마냥 잠시간 떠다녀볼까 싶어진다.


언젠가 다시 헤엄치고 싶어지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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