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눈이 그친 아침, 저는 지금 덕수궁을 내려다보며, ‘마이시크릿덴’이라는 공간에 앉아 있습니다. 명동에 들를 일이 있어, 급히 검색해 찾아왔는데, 기대치 못한 덕수궁 설경을 내려다보는 호사를 일요일 오전에 누리고 있네요.
저는 ‘공간’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의원 공간을 여러번 만들다 보니, 나의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늘 고민합니다. 지금은 잠실의 아파트 상가 한 켠에 작은 한의원 공간을 꾸리고 있지만, 언젠가 그럴싸한 건축물을 지어 집과 한의원 공간을 꾸미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는 다양한 공간을 찾아 경험해보려 합니다. 좋은 공간에 있으면, 시간의 가치가 오릅니다. ‘마이시크릿덴’에서 받는 느낌입니다. 차분한 피아노 음악도 좋습니다. 다만 조금은 사람의 자취가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서는 작은 숨소리마저 꽉 눌러야 할 것 같거든요. 분명 곁에 있는 사람을 억지로 지워야하는 느낌이 살짝 어색합니다.
2월, 저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신 이생 작가님의 개인전을 찾았습니다. 작가님의 사진이 추운 겨울 전시 공간을 따뜻한 공기로 담뿍하니 채웠습니다. 사진들은 고요하고 따뜻합니다. 의자 아래 숨겨진 블루투스 스피커로 파도 소리를 들으면 바다 사진을 바라보니 살짝 들뜬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백송 세 그루가 보이는 창문 너머 풍경이 너무 좋은데, 그 이유는 저의 등 뒤를 감싸는 따뜻한 사진들 덕분입니다.
사실 사진과 예술을 잘 몰라서 작가님에게 재미없는 질문들만 하고 왔습니다. 사진의 대칭을 맞추기 힘들것 같아요. 보정도 하시나요? 어떻게 이 순간을 잡아내나요? 여행지가 어딘지 알아맞추는 퀴즈 타임까지… 전시 공간을 나오면서 살짝 부끄럽습니다. 조금 더 멋진 감상과 칭찬을 전해드려야 했는데… 저의 예술 식견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내는 수준 낮은 질문만 늘어놓아 버렸습니다.
작가님에게 충분히 표현하진 못했지만, 무엇보다 사진이 채운 공간이 참 좋았습니다. 사진이 없으면 그저 빈 공간이었겠죠. 사진, 가구, 음악, 소리, 향기가 다함께 고요한 공간을 채웁니다. 전시 공간에서 사람이 느껴져 좋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공간에서 한의원을 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꼭 작가님의 사진을 한 켠에 걸어둬야겠습니다.
사진 전시를 들른 다음에, 다른 공간도 찾았습니다. 삼청동 한 가운데 멋진 3층 건물, 한방 느낌을 화장품에 물씬 담아낸 플래그십 스토어입니다. 창호문, 한복, 한약재, 고서까지 많은 소재들로 가득 채운 자본의 성공이 부럽습니다. 그런데 뭔가 어색합니다. 마치 물감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한 대리석 도화지처럼 보입니다. 공간에는 애정이 담깁니다. 아마도 한의학을 저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공간을 채우는 건 값비싼 인테리어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명절마다 고향에 내려가면 오후 시간에 꼭 들르는 동네 카페가 있습니다. 정말 동네 카페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분주히 들르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랑방 같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분위기입니다. 지난 명절부터는 카페 사장님과 수다도 나눕니다. 명절마다 기다리는 세 분 손님이라며 반갑다고 활짝 웃습니다. 저와는 정반대의 성격이라 매번 말을 건네는 사장님이 재밋고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병원을 이런 느낌으로 올 수는 없겠죠. 일단 병원이니깐요.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 병원을 차갑고 무서운 공간으로 만든 선배 의료인들의 역사적 사명 덕분입니다. 왜일까요? 병원은 하얗습니다. 하얀 벽, 하얀 가운, 하얀 알약, 하얀 모니터까지, 하얗게 물들인 병원에는 병균이 발붙이지 못할 듯한 결벽과 위생이 느껴집니다. 사실 아픈 사람이 모이는 병원은 병균 감염의 중요한 통로인데도 말이죠.
어릴 적 봤던 허준 드라마에서, 한의원은 아픈 사람을 연기하는 조연 배우들의 곡소리가 배경으로 깔리지만, 내 아픈 몸을 눕힐 수 있고, 그 방바닥은 왠지 뜨끈할 것 같고, 환자를 직접 만지고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한의사가 나의 아픔을 이해줄 것 같은, 뭐랄까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공간입니다.
저의 한의원은 이런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물론 아이들의 곡소리는 종종 들립니다. 그래도 저와 친해지면 한의원에 다시 오고 싶어합니다. 부모님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들은 꽤나 저의 전략이 잘 통합니다. 다행입니다. 한의사같지 않은 저의 외모는 부모님보다 아이에게 더 호감을 주는 듯 합니다. 이것도 참 다행입니다. 왜인지 저번에 온 아이는 저와 눈을 잘 못 마주칩니다.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한의원에도 카페같은 공간을 넣고 싶습니다. 꼭 진료가 아니라도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공간입니다. 한의원이니까 한약재를 우린 차도 내줘야죠. 혼자 와도 좋지만 함께 와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도 됩니다. 공간을 이용하면 음료와 디저트는 서운하지 않게 대접하고 싶습니다. 창문으로 보이는 정원에는 초록초록 식물과 복실복실 강아지가 채운 풍경이 보입니다. 바로 옆이 한의원 진료실이라 한약 향이 나더라도 싫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한의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진료실입니다. 저의 진료실은 지금도 독특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잘못 찾아온게 아닌지 낯설어하는 부모님의 눈빛을 매일 몇 번씩 경험합니다. 신발을 벗어야하는 질문도 많이 받죠. 서먹한 발걸음을 소파로 인도하고, 차츰 눈을 마주하며 대화는 깊숙이 들어갑니다. 저의 진료실은 마음을 놓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공간입니다.
저는 진료실에서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눕니다. 질문, 청취, 조언이 수 차례 반복하고, 중간중간 검사와 진맥이 들어갑니다. 진료가 아닌 상담을 받은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긴 상담 시간을 이끌어가지만, 꽤나 많은 시행 착오를 겪었습니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어색함이 역시 가장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보통 진료실의 분위기는 질문 하나 꺼내기 힘들게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인가 싶기도 합니다.
저의 진료실에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부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부모님 사이를 가로막는 책상을 없앴습니다. 부모님과 아이가 앉는 소파가 저의 의자보다 훨씬 편합니다. 아이가 진료실을 집의 거실처럼 편하게 느끼도록 분위기를 꾸몄습니다. 신발을 벗고 싶어하는 아이를 보면, 공간을 잘 만든 듯하여 뿌듯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지금 한의원 공간은 햇살이 없습니다. 제가 키우는 식물들이 무성한 초록잎을 꽤나 많이 떨구었습니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다음 공간에는 창문을 내고 싶습니다. 햇살이 한가득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저는 햇살이 가득 채운 공간에서 더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해가 뜨지 않은 날도 밝고 따뜻한 공기가 채우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공간을 찾는 아이와 부모님의 마음도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한의원 공간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