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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파이 May 13. 2024

예의와 무례사이

님아 그 선을 넘지 마오.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선물용 상품 준비로 바빠진 파이집.

덕분에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저씨 손님 한분이 가게 문을 밀고 들어오셨다.


"아유~아직 안 없어지고 영업을 하고 계시네??"


5~6년 만에 파이집을 방문하셨다는 손님은 두파이 중사이즈를 하나 포장해 달라고 하셨다.

댁에서 드신다고 잘라만 달라는 요청에 부리나케 컷팅을 해드렸다.


포장 준비를 해드리는 동안 아저씨는 여전히 영업 중인 파이집이 신기하고 반가우신지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가 전에 여기 종종 왔었어요. 그때 그 사장님 그대로이신 거죠? 서울 사는 조카들이 여기 파이 좋아해서 서울 갈 때 한 번씩 사가고 그랬는데 여길 잊고 살았네~

오늘 지나는 길에 혹시 아직 있나 싶어서 들렸는데 그대로 있어서 너무 좋네!"


반가움에 신이 나신 아저씨 말씀에 내심 뿌듯해졌다.

나도 웃으며 대답도 하고 맞장구를 쳐드리며 포장을 하고 있는데 말씀을 덧붙이셨다.


"여기 몇 년이나 됐죠?"


"아, 네~ 이제 10년 차예요~"


"아이고~ 그러면 내가 10년 전부터 왔나 보다. 사장님도 그때는 청소년처럼 보이더니 이젠 노숙해 보이시네."


쿠궁....


노숙이요??

원숙도 아니고 성숙도 아니고 노숙해 보여요?

아저씨 노숙하고 싶어요???


10년 새 훅 늙었나?

그래, 큰애가 초딩이다가 이제 고딩이니까 나도 늙긴 늙었겠지.

그래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훅 갔다는 말을 들으니 몸도 정신도 휘청거다.


뭐지? 공격인가? 싸우자는 건가?


그러기엔 아저씨 표정이 너무 밝으시다. 뭔가 친근함의 표현으로 농담을 던지신 거 같은데 실제로 10년 세월 먹은 파이집 사장에게 어퍼컷이 제대로 먹혔다.


애써 웃어 보이며 파이를 넘겨드리고 배웅 인사를 해드렸다.

그러나 돌아서는 내 얼굴에 남은 씁쓸함은 못 보셨겠지.


20대 시절 회사 다닐 때 50대 부장님의 노잼 개그를 많이 들었다. 부하직원들에게 장난 같기도, 인신공격 같기도 한 농담이었다. 듣는 사람은 앞에선 웃어 드렸지만 뒤돌아서는 왜 말씀을 저리 하시냐고 흉을 보곤 했다. 

그땐 내가 제일 말단 직원이라 아무도 호응 안 해주는 그 농담을 듣고 웃어드리는 역할을 곤 했다. 어쩐지 나까지 안 웃어드리면 부장님이 민망하실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 때문에 부장님이 팀원들의 불편함을 눈치 못 채고 계속 무리한 농담을 치셔서 곤란하기도 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쓰는 표현에 '긁혔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상하거나 멘탈이 흔들리는 말을 들었을 때 쓰는 표현이다. 또는 상대를 약 올리고 나서 긁혔냐고 조롱하는 표현으로 쓰기도 한다.

'긁다'라는 표현 원래 '신경을 긁다'라는 말로도 쓰는 말이지만, '긁혔다'라는 피동형 표현을 써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당했다는 의미로 쓰곤 한다.


이런 표현이 젊은 세대에게 자주 쓰이는 이유는 아마도 선 넘는 표현에 대한 불편함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개인성이 점점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시대에 내 멘탈을 흔들어 놓는 상대에게 거기까지만 하라는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졸지에 노숙해진 파이집주인은 고민 중이다.

미용실을 알아봐야 하나?

피부과를 가야 하나?

아니... 살부터 좀 뺄까?


맞다. 아저씨의 선 넘는 유머에 세게 긁혔다.

팩트로 조지지 마세요. 마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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