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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by 김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길이 두 갈래로 크게 나뉘었다. 위로 올라가서 한강 다리를 통과해가는 길이 있고, 내가 탄 버스는 한강을 건너지 않고 좌회전을 해서 간다. 아마 올라가는 길이 올림픽 도로인 것 같기는 한데 확신은 없다. 아무튼 그 올라가는 길 아래로는 벽이 있었다. 울퉁불퉁하게 장식을 해놓은 회색 벽이 넓게 있었는데, 버스는 그 벽에 아주 가깝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속도로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꽤 빠르게 벽을 지나쳐 갔다. 나는 이 순간 놀랐다. 창가에 앉아 있어서 벽과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었다. 한뼘보다는 더 되겠지만 그렇게 보일 정도로 가깝고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운전 기사는 이 길을 매일 지나갈 것이고, 그래선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좁은 길을 통과했다. 나는 이건 아름다운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정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일정하게 가는 건 훌륭한 기술이었다.

사람 사이에서 간격도 아주 절묘해야 하는데 그걸 잘 지키는 사람이 보통 세련된 인간관계 기술을 갖고 있다. 너무 마음을 터놓고 신뢰해버리면 부딪쳐 깨져버릴 것이다. 한 사람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은 완전히 동일할 수가 없고, 아무리 가까워도 마음의 크기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걸 꽤 비슷하게 맞춰 가는 건 기술이고 능력이다. 다른 사람이 어느 정도의 마음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고 나도 그 정도와 맞춰서 편안하게 해 주는 건 세련된 힘이다. 사람은 한 사람과만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여러 사람과 함께 지내느라 적절하게 거리를 갈아 끼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웬만큼 통용되는 거리를 장착하고 있는 게 편한데, 그건 예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쉬운 성질의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장착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게 사회적으로 통하는 상식이다. 이 상식을 모르는 사람은 사회에 적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의는 단순하게 인사를 잘 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하는 방식이 있는데 내가 거기서 혼자 나의 고고한 예의를 주장하며 내 방식대로 한다면 그 사람은 튕겨나갈 것이다. 물론 까마귀떼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고고함은 필요하겠지만, 꽤 괜찮은 사회 안에서조차 내가 백로로 보이고 어울릴 수 없다면 모든 건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느 정도 분위기 파악을 하고 적절하게 대화를 하고 말하고 칭찬하고, 대답하는 자연스러운 태도는 필수적이다.

어느 사회 집단에 가서 잘 어울릴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다. 나라는 사람과 결이 맞다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자연스럽게 행동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 사회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결국 나의 자존감을 채워주며 나의 자신감에 크게 기여한다. 점차 내집단이 되고, 가장 중요한 집단이 되어 내가 속하고 싶고 잘 지내고 싶고 나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고 싶은 곳에서 내가 좋게 평가받는다는 건 사회적 인간에게 무척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 필수적이지 않은 집단을 심적 내집단으로 여기고 애착을 보이는데, 만약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곳이 심적 내집단이 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일 수 있다.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곳은 보통 사회적으로 괜찮은 곳에 속한다. 학교나 직장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런 사회 안에서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다른 곳에 가서도 꽤 적응을 잘 해낸다. 반대로 필요하지 않은 친구 집단에서는 잘 지내는데 필수적인 사회 속에서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저 유아 청소년기 상태에 머무르는 것으로 보이기도 쉽다.

사람은 어느 순간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건 사회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적 인간은 경제적인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경제생활을 하면서 직장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꽤 건실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사람은 사회에 대한 만족도가 높고, 세상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인터넷 공간 같은 곳에서는 사회 비판이 잦고, 또 수능이나 교육 체제에 대한 불만도 많다. 입시철이라 더 그런 탓도 있겠지만, 실은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단순하게 성적만으로 모든 걸 평가하는 게 불만이라면, 이 사회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새로운 사회체제를 건설할 정도로 천재인지 아니면 무능력한 개인인지, 혹은 불평불만이 많은 극단주의자는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본인이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닌지 돌아보라는 사람들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세상에 성공한 사람들은 왜 존재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필요도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못 들어가는 것도 아닌 것을 떠올릴 필요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볼 기회가 없었다면 환경 탓을 할 필요도 있지만, 나이가 이십 후반을 달려가는데도 사회 탓을 하고 있다면 실제로 사회의 책임이 있다고 해도, 그 몫은 온전히 개인이 떠안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모든 게 운이고 유전이라고 해버릴 것이라면 그 말을 하면서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본인의 상황 마저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만들 뿐이라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운과 유전을 뒤바꾸기 위해서 당장 뭔가를 하는 사람이 있고, 말만 하고 비판만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왜 사회를 보는 인식이 다른지 그리고 결과물이 다른지도 알 수 있다.

차라리 다 필요없고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우직하게 노력하고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 나가는 게 낫다. 현실이 어떻든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고 있는 게 낫다. 남 탓, 사회 탓, 비판만 던질 거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이유도 본인이 알아야지. 운이 좋은 누군가를 부러워만 하며 결국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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