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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강 Feb 19. 2024

중국의 4대 미녀

  

청나라 초엽 무렵 정설로 정리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4대 미인에는 조비연이 들어가지 않고 엉뚱하게도 가상인물이 한 사람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네 명의 미인에는 춘추전국 시대의 서시(西施), 전한 시대의 왕소군(王昭君), 삼국 시대의 초선(貂嬋), 당나라의 양귀비가 선정되었는데, 엄격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이 네 사람의 별명을 이어 붙여서 만든 '침어낙안 폐월수화(沉魚落雁 閉月羞花)'라는 말의 운율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 서시



본명이 시이광이고 서자라고도 불린 서시는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워서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으면 강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 반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어 버렸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 침어입니다. 이런 서시에게도 단점이 있었으니 발이 다른 여인에 비해 컸다고 합니다.     


그녀와 관련해서는 침어 이외에도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역사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자(莊子)가 〈천운편(天運編)〉에 적어 놓은 일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아닐 확률이 높다.


서시는 권문세가 출신이 아니라 저라산(苧羅山) 부근에 살던 나무꾼의 딸이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그 미모가 워낙 출중해서 부근의 남자들 중 서시에게 연정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같은 동네에는 추녀가 한 사람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서시가 왜 그렇게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지 궁금했기 때문에 서시를 항상 따라다니면서 그 이유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서시에게는 원래 심장병이 있었는데 가끔 그녀의 약한 심장이 발작을 하는데 통증이 올 때마다 서시는 멈추어 서서 한손으로 가슴을 누르면서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추녀는 바로 그것이 서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자신도 한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습니다. 그러자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거나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서시빈목(嚬目)'은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라는 의미이며 '서시효빈(效嚬)'과 의미와 용례가 똑같은 사자성어로 본질을 망각하고 무작정 남의 흉내만 내는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서시봉심(奉心)'은 '서시가 가슴앓이를 한다'라는 의미이지만 '빈목'이나 '효빈'과 마찬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월나라의 왕인 구천의 충신인 범려가 오나라 왕 부차에게 공물로 바칠 정도로 서시의 미색은 타고 났다고 합니다. 그러다 월나라와 오나라의 전쟁으로 월나라가 승리 한 후 다시 고국인 월나라로 돌아와 구천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속설로는 구천의 정부인에 의해 비밀리에 제거 되었다고도 하고 범려의 여인으로 오나라가 망한 후 범려가 그곳을 떠날 때 범려와 함께 사라졌다고도 전해집니다.    

  

2. 왕소군

   

성이 왕이고 호가 소군인 왕소군은 원제의 후궁으로 궁궐에 입궐하여 궁인으로 살았습니다. 왕소군이 노래를 부르자 그 노래가 너무나 처연하고 아름다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었으며 또한 하늘을 날던 기러기 떼까지 그 노래에 넋을 잃고 날갯짓 하는 것을 잊어버려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다지요. 그래서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이 '기러기가 떨어졌다'라는 의미의 낙안(落雁)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BC 33년 흉노와의 친화정책을 위해 흉노 왕 호한야 선우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고 그 뒤 호한야가 죽자 흉노의 풍습에 따라 왕위를 이은 그의 정처(正妻) 아들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당시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였는데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고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화되어 후대에 많이 윤색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서경잡기 西京雜記>에 따르면, 원제는 화공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 원제는 그런 사실을 모르고 왕소군을 호한야에게 보내기로 결정한 후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고 나서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국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화공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또 〈후한서 後漢書〉·〈금조 琴操〉에는 왕소군이 몇 년 동안 황제의 관심을 받지 못하여 자진해서 흉노의 왕에게 시집갔으며, 그녀가 호한야의 아들에게 재가하게 되었을 때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고도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송되었으며,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어졌는데. 진(晉)의 석숭(石崇)이 작사·작곡하여 기녀에게 부르게 했다는 〈왕명군사 王明君辭〉는 매우 유명합니다.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을 비롯해서 당대의 시인들도 이 이야기를 즐겨 썼으며 원·명대에는 희곡으로도 각색되었는데, 특히 원대 마치원(馬致遠)의 희곡 〈한궁추 漢宮秋〉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합니다.  

   

3. 초선


초선은 비록 삼국지 상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습니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동탁이 이를 알자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옵니다.      


이를 이용하여 왕윤이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들었지요.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다만 나관중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의를 집필할 때 동탁의 시녀 대신 왕윤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한나라의 대신인 왕윤의 수양딸인 초선은 “너의 미모에 부끄러워 달이 구름 뒤로 숨는구나.” 하여 폐월로 불렸습니다. 초선은 간신 동탁과 동탁의 양아들 여포를 이간질 시키는 도구로 쓰여 졌고 여포가 아버지 동탁을 죽이고 군주에 오르는데 이를 두고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의 대단한 미녀라 하여 ‘경성지모’ ‘경국지색’이라 불렀습니다.        

  

4. 양귀비


중국의 4대 미인 중에서 연대기상의 마지막 인물은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은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입니다. 그녀의 본명은 옥환(玉環)이며, 태어날 때 손목에 옥팔찌를 두르고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린다 하여 ‘절세가인’이라 불리었고 자신의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현종은 양귀비를 ‘헤어화’ 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또한 '꽃이 부끄러워한다'는 의미의 '수화(羞花)'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양귀비가 내원을 거닐다 함수초(含羞草) 라는 식물의 꽃에 손을 댔는데 갑자기 잎이 말리면서 움츠려들었고. 이 광경을 목격한 한 시녀가 그녀의 미색에 꽃이 부끄러워하며 움츠렸다는 소문을 냈는데, 이 소문이 그대로 그녀의 별명이 되었습니다.     

귀비는 황비(후궁)로 순위를 나타내는 칭호입니다. 당 현종 이융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그것이 과도하여 끝끝내 안녹산과 사사명이라는 두 호족 세력 무장 대표가 공동 주도하여 반란을 획책한 이른바 안사의 난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 역사적 사건의 배경을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고도 부릅니다.     


또한 그녀는 현종 황제가 가장 아끼던 딸 함의공주(咸宜公主)와 친하게 지냈는데, 함의의 소개로 그녀의 오빠이자 현종의 열여덟 번째 아들인 수왕(壽王)과 만났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이때 그녀의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다고 합니다.    

 

양귀비를 당나라가 멸망한 주요 원인으로 보는 견해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당 왕조는 양귀비가 죽은 다음에도 150년이나 더 지속되었으며, 망한 원인도 체제가 가지고 있던 구조적인 모순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입니다.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해서 나라 전체의 부는 크게 증가했지만 체제의 결함으로 인해 그 부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종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완벽하게 몰락시켰다는 점에서 양귀비는 분명히 팜므파탈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엄정하게 이야기한다면, 사실 현종의 몰락도 근본적으로는 양귀비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격적인 결함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는 군주보다는 예술가에 훨씬 더 어울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이 역사를 뛰어넘는 큰 스캔들이었던 것은 분명하고 양귀비보다 두 세대 정도 뒤에 태어난 백거이(白居易)는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7언 장시로 노래했습니다.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고 하는 이 천재 시인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네 개의 장으로 나누어 장장 120행이나 되는 멋진 시를 만들었는데, 이 명시가 바로 〈장한가(長恨歌)〉입니다. 현대 젊은 남녀들이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연리지(連理枝)'나 홍콩 영화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말이 이 시의 가장 마지막 구절에 들어 있지요.  

   

하늘에 있다고 하면 비익조가 되고 싶고(在天願作比翼鳥)

땅에 있다면 연리지가 되고 싶다 했었네.(在地願爲連理枝)

끝없는 하늘과 땅도 끝날 때가 있건만(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그칠 때가 없구나.(此限綿綿無絶期)      

비익조는 암수가 짝을 찾으면 자웅동체가 되어 한 마리가 한쪽 날개로만 날아다닌다는 전설 속의 새이며,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가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한 그루의 나무처럼 된 상태를 말합니다.


사진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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