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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강 Feb 28. 2024

 학교 이야기5

 5. 최고수    


내가 처음 만난 최고수는 대구교도소에서다. 당시 대구는 미결수들을 위한 구치소가 없어서 형이 확정된 기결수들이 있는 대구교도소 일부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자기 집이 되는 기결수들은 넓은 운동장을 사용 할 수 있었지만 미결수들은 아주 좁고 좁은 공간에서 운동을 해야 했다. 달리는 것은 할 수 없고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뱅뱅 운동장을 도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 힘이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그 좁은 운동장에서 최고수를 만난 것이다. 그 복잡한 운동장에 유난히 몇 사람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운동을 하고 있었다. 더워서 겉옷을 벗고 반 팔 셔츠만 입은 채로.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넓은 공간으로 가서 맨손체조도 하고 걷기도 하였다. 그런데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이상했다. 힐끔힐끔 기분 나쁠 정도로 쳐다보고 지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운동이 끝나고 방으로 가기 위해 윗옷을 입었는데 우리와는 다르게 명찰이 빨간색이었다. 궁금한 것을 못 참는 나는 바로 질문을 던졌고 그는 빙긋 웃으면서 ‘나는 해병대 출신이라 빨간 명찰입니다.’ 라고 답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대한민국 해병대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징역 안에서까지 빨간 명찰을 달고 다닐까 궁시렁 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말자 사람들이 우루루 몰라 나를 둘러쌌다. ‘간이 부었느냐’ ‘한 방에 죽고 싶으냐?’ 는 등 별 별 이야기를 다 하면서.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했다. 아까 내가 따지듯 물은 그 빨간 명찰이 사형수(최고수)란다. 언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모르는.     



사태가 한 눈에 들어왔다. 그가 최고수이다 보니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공간을 넓혀 준 것이고 더러는 두렵고 무서워서 피했을 것인데 아무리 시국사법이라지만 들어 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재소자가 그 사람들 가까이서 운동을 하고 피하지도 않고 거기다 말도 안 되는 질문까지 했으니. 이해가 갔다.    

 

최고수들은 대부분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돌이 있는 구치소에서 생활한다. 일반 재소자들이야 형이 빨리 확정되어 교도소로 가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일지 모르지만 최고수들은 형이 확정되면 그 날이 바로 생의 마지막 날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죽기 하루 전 날까지 미결수도 구치소에서 생활 하는 것이 원칙이고 구치소가 없는 곳은 교도소에서 생활한다.  

    

1997년 여름의 대구교도소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더워도 운동장을 나가는 것은 잠시라도 걷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다. 당시 나는 독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옆방에도 최고수 한 명이 있었다.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난 후, 그가 경찰관 총기난동사건의 김 아무개라는 것을 알았다.   

   

운동장에 나가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섯 명의 최고수들과 함께 운동을 해야 했는데 최고수 다섯 명이 움직이면 경비교도대(군 입대 대신 교도소를 지키는 대원으로 입대하여 군 의무를 하는 사람) 몇 사람이 더 늘어 날 정도였으니 그들은 이름과 존재감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데 나는 그들이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그들 또한 나를 다른 재소자들과는 다르게 대해 주었다. 시국사범인데다가 작고 조금만 사람이 데모를 하다 들어 왔다고 하니 그 들 눈에도 내가 신기해 보였나보다. 

     

나는 자연스럽게 최고수 그룹에 포함 되었으며 그들과 함께 운동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명은 일반 재소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고 한 명은 내 옆방에서 같이 독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왜 독방을 사용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내 옆방에서 나를 친 형제 이상으로 살펴준 사람이다. 그 사람 때문에 가족을 잃은 분들이 읽으시면 하늘이 무너질 일이지만 내가 본 인간 김 아무개는 나와 다름없는 보통 사람으로 기억 되며 오히려 나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 준 사람이다.  

   


1997년 7월 20일. 내 생일이었다. 그 날 그가 나에게 준 선물은 까만 반팔 티셔츠와 책 한 권이었는데 그 셔츠가 유명한 아르00 라는 제품이란 것도 그를 하늘로 보내고서야 알았다. 내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어 본 고급 옷인 샘이다. 아마도 그는 그 옷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편지를 보냈을 것이고 본인의 사이즈도 아닌 옷이 왜 필요했는지 많은 덧붙임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신문에 실리는 신간이란 신간은 거의 다 구해 주었고 본인에게 없는 것들은 다른 최고수들에게 부탁하여 물건을 구해 주었다.     

 

그가 구해준 물건들은 종류도 다양했다. 편지지와 우표. 노트와 필기도구. 그리고 각종 먹을 것 들. 속옷과 수건, 양말. 방 사람들이 면회 오면서 받아 온 귀한 먹을 것도 본인이 먹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운동 시간에 전해 주거나 면회를 다녀오면서 내 방에 들려 나에게 전해주고 갔다. 그렇게 나는 다섯 명의 최고수 덕분에 범털보다 더 편하고 안락한 수용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그 날이 왔다. 1997년 12월 29일. 최고수들은 연말을 싫어했다. 형의 집행이 대부분 연말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날 운동시간에 운동장에서 만난 우리 여섯 명은 최소 1997년은 무사히 넘길 것이라 안도하며 웃으며 서로를 격려했다. 그들은 12월 1일부터 하루하루를 긴장하고 마음 조렸을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각 방으로 헤어지면서 어쩌면 내년에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새해 인사까지 하고 헤어졌고 옆 방 김 아무개 형은 네모네모로직이라는 책을 한 권 건내 주면서 책만 읽지 말고 틈틈이 머리도 식히라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997년 12월 30일. 그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옆 방 김 아무개 그가 가는 마지막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는 그렇게 가면서 내 방 앞에서 잠시 멈추어 나를 쳐다보고 갔다. 그렇게 그들이 세상을 떠나보내고 나는 일주일 정도 운동장에 나가지 못했다. 고열과 심한 우울감에 시달렸으며 밤에는 꿈도 꾸고 헛소리도 했다고 한다. 의무병동으로 옮기려 했는데 독방 수용이 원칙인 재소자라 그냥 두었는데 밤마다 경비 교도대원들이 교대로 나를 지켰다고 한다. 행여 나쁜 생각을 할까봐.     


그렇게 일주일을 앓고 볕을 보기 위해 운동장에 나갔는데 운동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부터 하늘로 간 최고수들은 이 공간에 없었던 것처럼 모두가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오히려 조금 더 활기차고 밝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당시 나의 충격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일반 재소자들이 같은 방에서 최고수들과 사는 일은 조심스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했다. 그에게 조금 불편한 기색만 보여도 긴장하고 무슨 일이든 그에게 먼저 의견을 물어야하기에. 다는 그러지 않지만 사형을 언도 받고 초기에는 예민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불만도 있어 거칠고 난폭하지만 각 종교단체의 성직자 수도자들과 일반인 봉사자들에 의해 많이 순화되고 정화 된다.  

   

나는 사형폐지를 찬성하는 사람이다. 난폭하고 거칠고 조금은 무서운 사람에게 시간과 정성과 많은 노력을 들여 변화를 준 다음 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모순이라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많은 최고수들은 정말이지 저 사람이 사람을 상하게 했을까 싶을 정도의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대구도소에 있는 박 아무개 최고수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대구교도소에서였다. 그도 일반 재소자들과 함께 방을 쓰다가 공부가 하고 싶다는 이유로 내가 있던 독방의 바로 앞방으로 옮겨왔고 그 때부터 친해지기 시작했다. 햇수로 20년이다. 그가 나에게 보내준 편지가 파일로 몇 개는 되었는데 더러는 불에 태우고 지금은 하나 정도를 가지고 있다.    


내가 암으로 치료를 받을 때. 그는 자신의 영치금 중 백만 원을 병원비로 보내 주기도 했다. 영치금도 교도소 밖으로도 나 올 수 있다. 담당 재소자의 교정 교화에 필요한 일이라고 교도소장이 인정하면 되는 일이라 들었다. 나도 병원비를 받기 위해 진단서와 통장 사본 등 꾀 많은 서류를 교도소로 보냈고.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 그 돈을 받았다.  

     

나도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했을 터인데 미약한 사람이다 보니. 편지 보내는 것. 어쩌다 면회 가서 얼굴 보여 주는 것이 전부이다. 언젠가는 그의 부모님을 찾아 만난 적도 있었다. 그를 찾아오는 유일한 두 사람. 나와 그의 동거녀. 하지만 이제 동거녀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20년 동안 그를 찾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 되었다.   

   

그는 최고수로 살면서 방송대학까지 졸업했고 불교를 거쳐 지금은 신심 깊은 기독교 신자로 살고 있으며 발명을 하는 취미를 가져 특허 등록을 몇 개  씩이나 한 사람이다. 더러는 그를 도와주는 대학교에 특허를 기증하기도 하고. 이 모든 일들을 교도소 안에서 하는 사람이 그다. 내가 그를 안지가 20년이 되었으니 그도 최고수란 빨간 명찰을 달고 20년 째 교도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를 위해서라도 나는 사형반대. 사형폐지를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했다. 그의 손에 생을 다한 그 분에게는 정말이지 죄송하고 송구한 일이지만 나는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친 20년의 세월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기적이 있다면 그에게 꼭 일어나기를 빈다. 내 20년 지기 친구에게.  

   

어느 땐가 서울구치소 최고수를 면회를 하고 나오다가 지나가는 자동차를 얻어 탄 적이 있었는데 그 차에 타신 분들이 불교여성 무슨 단체의 회원들이었는데 매 주 서울구치소 최고수 중 불교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을 만나러 오간다고 들었다. 나도 자연스럽게 알게 된 최고수 한 명을 접견하러 다닌다고 말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2년 정도 서울구치소 교정위원으로 접견을 다닌 것 같다. 일반 접견과는 달리 작은 사무실에서 얼굴 마주보고 할 수 수 있는 접견이라 참 좋았다. 당시 최고수들도 내가 작가 지망생인 것을 알고 본인들이 읽고 난 책을 여러 번 나에게 전해 주기도 했고 더러는 책을 구매해서 주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당시 대학원생이던 나는 그 단체의 장학금도 한번인가 받은 기억이 나고 최신 컴퓨터도 선물로 받았다. 지금도 다니시는지 궁금해진다.


사진 : 다음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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