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선만
내가 아는 그 선배는 인생을 내내 감성적인 아날로그처럼 살아왔다. 마치 구한말의 지식인처럼 기자가 되려 했고 작가가 되려 했으며, 그 무엇보다 시대에 고뇌하는 인간이 되려고 했다. 한 참을, 여전히 디지털 시대에 지치고 쓰러지고 작아지더라도 꿈은 낭만적으로 꾸는 그 어떤 이가 되려 했다.
내게 처음으로 기형도의 시집을 사주었고, 내 시덥지 않은 건방에도 반응하고 젊은 날의 열정으로 받아줬다.
언젠가 한 동안의 소원함과 서먹함에도, 아니 젊은 시절 잠깐의 만남과 인연에도…오랜만에 만난 회한과 추억으로 나를 나보다 더 낭만적이고 멋있게 기억해 주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여전히 낭만적인 그 선배가 소설가가 되었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줄 안 것처럼…
여기에 그의 소설집을 소개한다.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편견 없이 보려 한다.
낭만주의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를 추억하며……
또한 그 시절, 그 공간에 서점의 이름이기도 했던 그리운 시 구절을 적어본다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고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 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24.6월. 로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