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지막 날에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을 찾았다. 박물관의 건축 구조물과 5월의 하늘이 눈앞에 거대한 액자를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남산타워를 두고 액자를 온통 하늘색과 구름색으로 가득 메운 풍경화를 마주한다. 모처럼 하늘을 유심히 본다.
뮤지컬 파가니니(Paganini).
이탈리아 제노바(Genoa)에서 태어난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는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다. 그는 현대 바이올린 기법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지금. 제노바로부터 9,000km 정도 떨어진 서울에서 K-Musical의 무대를 통해 그를 만나본다.
나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고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하드록과 펑크, 헤비메탈 시대를 장발로 건들거리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를 알 리가 없다. 바이올린이 만들어 내는 때로는 감미롭고 때로는 격정적인 선율. 그 느리고 빠른 완급의 테크닉을 통해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선(線)상의 멜로디는 강한 비트와 금속성 전자악기 음질에 젖어 젊음을 보낸 나로서는 접해 보지 못한 또 다른 세계다. 오늘 파가니니의 이야기에 함께 하신한국예술행정협회 장소영 사무처장께 감사를 표한다. 또한 파가니니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풀어내신 HJ컬쳐(주) 한승원 대표에게 감사를 드린다.
HJ컬쳐는 뮤지컬, 콘서트 등의 공연제작과 배우 매지니먼트, 그리고 다양한 소재의 문화콘텐츠 개발과 제작에 종사하는 문화콘텐츠 기업이다. HJ컬쳐의 라인업인 뮤지컬 파가니니가 6월 2일(일) 막을 내리고 이어서 뮤지컬 살리에리가 7월 11일부터 9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그 막을 올린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 역시 궁금하다.
HJ컬쳐가 펴낸 책자 <뮤지컬 파가니니>에 따르면,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7살에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9살에 작곡을 하고 대중 앞에 섰다. 만돌린 연주가인 그의 아버지는 파가니니를 혹독하게 연습시키며 때론 밥을 굶기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이러한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통해 성장했다. 파가니니는 스스로 경제적 자립이 가능해지면서 아버지의 통제를 벗어났고 술과 도박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유소년기에 그에 어울리는 성장과정을 거치지 못한 그에게 한편 동정심이 가는 부분이다.
방탕한 사생활과는 달리 그의 명성은 높아지고 연주는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813년 10월 29일 밀라노에서 첫 번째 독주회를 했고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이후 유럽 전역이 그를 원하면서 1828년에 시작한 유럽 투어는 1831년까지 이어졌다.
그는 음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카지노 사업의 실패, 방탕한 사생활, 여러 질병에 의한 기괴한 모습으로 많은 음모와 비난에 시달렸다. 1840년 그는 교회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그의 시신은 교회의 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그에게는 극진히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정신적, 신체적 학대를 받은 파가니니는 그의 아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주면서 자신의 어린시절을 보상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가 눈을 감던 당시 그의 아들 아킬레 파가니니는 14살이었다. 아버지 파가니니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고 또한 아버지의 노력으로 남작 지위까지 얻은 아킬레 파가니니는 아버지의 명예와 유언을 지키기 위해 종교재판장에 나서서 36년 동안 재판을 진행한다.
36년의 힘든 싸움을 거쳐 아킬레는 상속받은 토지 일부와 거금을 헌납하고 마침내 아버지를 밀라노의 동남쪽에 있는 파르마의 새 묘지에 기념비와 함께 안장할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싸움에 나선 14세의 소년 아킬레는 어느덧 50세의 중년이 되었다. 아킬레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교회의 묘지에 매장하기 위한 허가를 얻기 위해 그의 청춘을 다 바친 것이다. 무엇이 그를 움직였을까? 많은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갖는 파가니니의 천재적 재능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들 부자 간의 사랑 이야기에 붙들려 있다. 아킬레의 36년을 생각하니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느껴져 그저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뮤지컬 파가니니는 배우들의 가창력이 인상적이다. 특히 파가니니 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 노래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Actor의 자질은 물론이고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연주를 통해 관객에게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Musician의 역량이 필요하다. 그래서 뮤지컬 파가니니는 주연 배우인 KoN의 매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서울대 음대 석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다. Z세대의 관객을 극장으로 모이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HJ컬쳐가 펴낸 책자 <뮤지컬 파가니니> 마지막 페이지에는 아킬레 파가니니가 그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실려있다:
"아버지, 어느덧 36년이 흘렀습니다.이제 편히 쉬게 해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저도 마음 편히 몸을 뉘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하여 재판장에 처음으로 섰던 날이 기억납니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나의 입을 주목하던 낯선 사람들이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랑에 비하면 그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연주 여행이 생각납니다.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 호텔이 아닌 펜션에 묵으며 저를 위해서라면 어떤 부탁에도 고개 숙이며 말씀하셨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이제서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답한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