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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종 Jan 03. 2024

어쩌다 (꽃씨 상점) 사장

우주가 나를 여기로 이끌고 있나

꽃씨 상점 '파종' 준비가 한창이다. 패키지 안에 들어가는 구성품을 고르고, 엽서 디자인을 하고,  가장 중요한 큐레이션의 꽃의 종류들을 골랐다 뺏다가 그 지리한 과정을 반복 중이다. 어제는 검역본부에서 아직 오지 않고 있는 나의 씨앗들이 언제쯤 오는지에 대한 문의도 했다. 은근히 손이 많이 드는 상점이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큐레이션 주제를 정했고, 어떤 씨앗을 공유하면 좋을지 리스트도 거의 다 정해져 둔 상태다. 정해진 씨앗들이 피워낼 꽃들을 상상하며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이 기분 좋은 상상의 질감을 '파종'에 오는 사람들과 벌써부터 나누고 싶다. 


씨앗과 관련된 준비를 하는 게 아닐 땐 가끔씩 병뚜껑을 매만진다. 당찬 포부로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이 병뚜껑들로 화분을 만들겠다고 지금껏 사 모은 장비을 꺼내 아웃풋이 좋지 않은 화분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물건을 들었다놨다 한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지금, 나는 꽃씨 상점 사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혹은 우주가 나를 여기로 이끌고 있는지 운 좋게 꽃씨 상점이 내 앞에 놓여져 있다. 사람들은 묻는다. "응? 왠 씨앗? 발아? 파종? 그럼 화분이나 식물은 따로 안 팔아? 딱 씨앗만 있는 거야?", "근데 왜 그 많은 아이템 중에 씨앗이야?" 나를 염려하는 혹자는 "씨앗은 정말 돈이 안 되지 않아요?"라고도 물어보고, 우리 동거인은 장난으로 "꽃씨 가게는 대학원 오지 않았어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라고 씁쓸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질문들은 다음 글에서 다뤄보기로 하고 넘어가자)


대부분의 이가 그렇겠지만 나의 초록 생활도 처음은 실내 식물이었다. 그렇게 많이 신경써 주지 않는 것 같은데 뿅하고 새로운 잎들이 날 때마다 묘한 감정을 느꼈다. 당시 내 인생에 가장 큰 풍파를 겪고 상담으로 생을 연명하고 있던 때였는데 그때 나를 많이 도왔던 것이 식물들이었다. 너무 F스러운 고백이지만 새 잎이 날 때마다 그 식물들이 "너에게도 곧 새 잎이 날 거야"라고 위안을 주는 듯했다. 


그 경험을 시작으로 몇 년간 실내와 실외, 정원 활동까지 돌고 돌아 내가 보고 싶은 꽃은 직접 파종(Sowing, 종자/씨앗을 뿌리거나 심는 일을 의미함)하는 일까지 하게 됐다. 파종하려고 국내외 사이트를 돌며 2~3달 넘게 걸려 씨앗을 받아 파종을 하고, 그 종자가 아주 기특하게도 발아를 해 싹을 틔우고 덩치를 키우고 꽃잎을 내고 벌과 나비를 불러오는 그 과정을 보면 그 시간들이 참으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그러고 나니, 나에게 파종을 하는 일은 하나의 리추얼 행위로 다가왔다. 매해 봄이 오기 전, 혹은 가을이 오기 전에 파종할 씨앗을 고르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흙을 넣고 언제 파종했는지 다이어리에 날짜를 적고 불과 며칠 만에 싹을 틔운 백일홍(학명: Zinnia elegans)의 생명력이 놀라기도 하고. 내가 키운 꽃을 애정하는 사람에게 선물하고. 서로 꽃 이야기를 하며 너무나 즐거워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살아 왔다. 


졸업을 앞둔 석사생에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길 앞에서 꽃씨 상점은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일이었다. 파종의 문구처럼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여유를 선물하는" 이 일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꽃씨가 많이 팔리느냐는 나중 문제라고 생각하는 철없는 기질도 한몫했겠지만, 마이너스가 될 것보다 플러스가 될 게 더욱 많으니 꽃씨 상점 사장이 안 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나는 파종을 제주에서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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