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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키코모리 K선생 Dec 01. 2024

바른말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동굴 속 이야기 서른

<쓰리 빌보드, 2017>란 영화가 있다. 


딸 캐서린은 엄마 밀드레드에게 차를 빌려주지 않으면 걸어가다가 강간을 당해 죽을지도 모른다고 소리친다. 그 말에 엄마 밀드레드는 화가 나서 딸의 뒤통수에 대고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날, 딸 캐서린은 걸어가다가 강간치사로 죽었다.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


말은 입을 떠난 순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다.




Three Billboards처럼 말은 우리에게 극단적인 상처를 남기곤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일로 이어지는 말이 쉼 없이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 우린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의 무거움과 두려움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런 알기 쉬운 사건은 일어나질 않는다. 


그래서 극단적인 일로 이어지는 말을 매일같이 내뱉고 있음에도 말의 무거움이나 왜곡의 비용을 체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제하지 않는다. 가볍게 여긴다. 투머치토커가 된다.


내가 내뱉는 말은 상처로 조용히 누적된다. 남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잔상이 남는다




감정을 배설하기 위한 거짓말은 상처를 주기 위한 말이다. 과장과 비약은 목적을 관철하기 위한 말이다. 그렇다면 상대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거짓말은 무엇일까? 맥락 속에서 선의와 예의, 배려, 편의, 효율, 유머, 필요로 포장되고 사회적인 행동으로 당연시될 때가 많다.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 생각을 묵살하고 나와 일치하지 않는 말을 뱉어내는 일이 당연시되어도 괜찮은 걸까? 내 진심을 무시하는 말을 뱉을 때마다 내 자아는 일그러지는 게 아닐까?


자신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날이 도래한다면 그것은 내 진심을 무시하고 나를 상처 입히면서 거짓말을 뱉어낸 나날들이 쌓인 결과가 아닐까? 

타인의 필요에 맞추어 떠받들어지는 것이 내게 충분한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에게 진실한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다른 이를 존중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존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바른말을 말하고 싶다. 당신에게 진실하고 싶다.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싶다. 

신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진실로 노력하고 싶다.



- 가끔 히키코모리를 아이로 둔 어머님을 만난다. 도움 되고 싶은 마음과 선을 지키는 젠틀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다. 가식 반절 진심 반절. 쉽지 않다.

진심이 반을 넘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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