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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 Feb 06. 2024

말라가 여행으로 시작해 보자

농사짓기 전 체력다지기

여행 출발 전, 12월 초 밭 모습

천천히 시간을 들여 짐 싸는 것을 좋아하는데 짐 싸는 것에 최선을 다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여행 출발 전,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다. 짐 싸는 것보다 급한 건 몸을 추스르는 일이었다. 집을 정리하는 것도 밭을 정리하는 것도 원하는 만큼 하지 못했다. 연못의 물은 표면부터 얇게 얼기 시작했고 뿌려놓은 호밀과 보리 씨앗은 어느새 훌쩍 자라 색을 잃어가는 밭에서 유일한 푸르름을 자랑했다. 출발 날짜는 다가오고 몸은 나아지지 않으니 비몽사몽으로 짐을 꾸리고, 병원 가서 약을 타오고, 다이소에 가서 급하게 허리 벨트도 샀다. 체중이 급격히 줄어 바지가 커진 탓이다. 짐을 급하게 싸다 보니 이것저것 가방에 더 넣게 된다. 기내용 캐리어 한 개, 32리터짜리 배낭 한 개를 꽉꽉 채워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12월 초 인천공항
비행기 탑승 직후

각종 조명과 크리스마스 오브제들로 가득한 인천공항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다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평소 농사지을 때 장화나 안전화를 즐겨 신는데 장화는 부피가 너무 커서 안전화를 챙겨가기로 했다. 비행기에서도 안전화를 신고 있는 우리를 보니 농사여행을 가는 것이 불쑥 체감됐다. 인천에서 프랑스 파리 샤를드공항까지 14시간이 걸리고 샤를드공항에서 두 시간정도 대기했다. 면세점에서 마음에 드는 알이 작은 검은색 시계가 있어서 살까 고민하다가 달러로 쓰여있는 가격이 왠지 낯설어서 사지 않고 자판기에서 물을 샀다. 목이 무척이나 말랐는데 약 4천 원이나 했던 물이 영 맛없어서 두 모금도 못 마셨다. 말라가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고 별다른 수속절차 없이 바로 세상에 나왔다. 얼굴을 훅 치고 들어오는 미지근한 공기가 왠지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저녁 늦게 도착했는데, 우리처럼 어디로 나가야 할지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새벽 한시쯤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큰 택시를 타고 숙소에 갔다.



에어비엔비로 예약한 숙소였는데 호스트와 같이 집을 쓰는 형태였다. 첫날은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숙소는 마치 저번 주에 이사 온 것처럼 별 가구도 잡동사니도 없는 텅 빈 집이었다. 부엌도 깨끗하고 거실에 있는 수납장도 텅 비어있었다. 우리 방은 화장실을 지나 있는 작은 방이었는데, 방 크기의 3/4을 차지하는 큰 침대가 중앙에 있고 수납장과 선풍기, 작은 협탁이 있었다. 대충 급하게 필요한 것들만 꺼내놓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이곳에서 서너 일 머물며 시차적응도 하고 감기걸린 몸도 회복시키고 스페인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12월 초 흐린 날의 말라가 시내. 작은 오렌지 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있다.

처음 맞는 말라가에서의 아침. 해가 늦게 떠서 8시는 되어야 날이 조금 밝아졌다. 날이 조금 흐렸지만 공기는 맑았다. 건물에서 나와서 몇 걸음만 걸으면 카페가 몇 군데 보였는데, 바깥공기가 찬 데도 테라스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와인을 마시는 광경이 신기했다. '아침부터 알코올을?' 아침으로 먹는 음식은 토스트 한 빵에 토마토소스 같은 것이 아주 얇게 발린 것, 갓 튀긴 추로스 같은 것이었다. 거의 소스 없이 빵을 먹는 것처럼 보여서 이 사람들은 빵의 민족인가보다 했다. 우리는 북적이는 카페에 들어가 간단히 샌드위치 같은 것을 먹고 나와서 해변을 걸었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오렌지나무 덕에 내가 스페인에 왔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따 먹어보고 싶은데 아무도 먹는 사람이 없다. 눅잔이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구경하고 걸어가서 말라가 중심가까지 갔다. 만남의 장소 같은 곳이라는 이곳은 명성답게 오전시간임에도 사람이 꽤 많았고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했으며 큰 옷가게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말라가 시내의 저녁 풍경

나와 눅잔 모두 아직 유심을 사기 전이라서 구글 맵 없이 오로지 감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음식점을 물색했다. 그러다 눅잔이 이곳에 살 때 가본 것 같다는 음식점을 발견해서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문어 튀김과 가지 튀김 요리를 주문했는데, 며칠 전에 만든 것처럼 딱딱하고 오래된 맛이 났다.


"눅잔아, 여기 맞아..?"

"아닌 것 같아.."


결국 포장을 요청해서 숙소에서 다르게 요리해서 먹기로 하고 다른 곳에서 밥을 먹었다. 또 배가 금방 불러져 배를 꺼뜨리려고 하염없이 걸었다. 저녁엔 눅잔 친구를 만나 아이스크림을 먹고 저녁도 먹었다. 아니, 이곳은 아이스크림 맛집인가? 오늘 먹은 것 중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었다. 우연히 거리 점등 이벤트를 하는 날이라 이벤트를 보며 같이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를 불렀다. 유명한 캐럴도 나오고 처음 들어보는 캐럴도 나왔는데 거리에 있는 모두가 같이 노래를 부르며 흥겨워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모두 행복해 보이는 그 순간, 나도 단순하게 행복하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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