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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기 Feb 14. 2024

농사여행 #3

모자람과 넘침

말라가에서 감기기운을 털어내는데 시간을 주로 보내고 조금은 야심찬 마음으로 첫 농사여행 행선지인 그라나다로 향했다. 말라가에서 차로 한시간 반 걸리는 그라나다는 말라가보다 약간 위쪽에 위치해 있는데, 가는 길 내내 올리브 나무가 많이 보였다. 풀도 없는 마른 땅에 올리브 나무가 줄지어 나란히 자란 모습이 신기해보였다. 비가 내려도 바로 증발해버릴 것 같은 건조해보이는 산맥을 연이어 지나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너가구 이상 모여있는 동네라도 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것 같은 세상과 조금은 동떨어진 곳이라는게 이곳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고 지나 마주친 사방이 뻥 뚫린 지대가 대조적인 감동을 주었다.



이곳은 생태적으로 살기 위해 만들어진 커뮤니티 공간으로 군데군데에 친환경적인 요소가 녹아있었다. 자는 곳은 돔 형태의 아름다운 유르트였다. 기초가 되는 나무에 칠해져있는 문양들이며 유르트 가운데에 있는 화목난로가 낭만적으로 보였다. 주방과 화장실, 샤워실은 각각의 건물로 존재했는데 물을 최대한 아끼기 위한 장치들이 곳곳에 있었다. 스페인의 다른 지역에서 커뮤니티 생활을 하던 사람이 새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 곳이었다. 건축자재 조달도 어려워보이는 이곳에 하나하나 작은 공간들을 지었으니 호스트의 이곳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곳인 만큼 다소 엄격한 생활 규칙들을 몸에 익혀나갔다.

춥게 자는 것, 적게 먹는 것, 빨리 씻는 것.

부엌에 있는 재료 중 쓸 수 있는 재료가 한정적이고, 마시는 물뿐 아니라 설거지하는 물도 한정적인 상황이었다. 주방이 협소한데 호스트와 공유해야하는 상황이라 같이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되도록 먹지 않았다. 마트가 걸어서 한 시간반 남짓의 걸리는 거리에 있었고 일하는 시간이 길어서 걸어가기엔 사실상 불가능했다. 자동으로 금욕적인 마음가짐으로 그곳에서의 생활을 이어갔다. 가방에 먹다 남은 젤리와 감자칩, 이온음료 등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너무 피곤하거나 식욕이 일 때 아껴서 먹었다. 하나있는 이온음료 한 캔을 낮동안 열심히 일하고 한 모금 마셨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유르트

지냈던 곳이 유르트였는데 중앙에 화덕난로가 있었다. 땔감으로 쓸 수 있는 나무토막도 어느정도 정해진 양이 있어서 자연스레 자다가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불을 피웠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유르트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급속히 차가워졌는데, 나무로 불을 피우는 그 때만 주변의 찬기가 약간 가실 뿐 덮고있던 이불은 아침까지 차가웠다. 그럼에도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아침 저녁으로 선명히 보이던 별들이었다. 유르트 안 밖의 온도가 비슷해서 안에 있기보다는 밖에 있는 선택을 하곤 했다. 춥지만 아름다웠던 풍경들이 나로 하여금 이 속세의 욕망을 잊게 해주는데 도움을 주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별자리를 보러 자주 나왔다. 종종 보이는 혜성이 신기해서 소원 빌기를 여러번 했다.


올리브 열매 수확 중

한창 올리브 수확철이라 올리브 수확을 하고, 몇 주 전 수확한 아몬드 선별작업을 이어나갔다. 아몬드 선별작업 방식에서 나는 어떤 예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호스트와 함께 작업했는데, 한 포대가 끝나고 다른 포대를 새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 선별이 끝나가면 새로운 포대를 붓는 방식이었다. 결국에는 선별을 다 해나가야 하는 것인데 새로운 포대를 풀어놓으니 선별 작업 후반부로 갈수록 작업 속도가 더뎌졌다. 그래놓고는 우리의 작업속도가 느리다는 소리를 들으니 맥이 탁 풀려버렸다. 맥이 풀리는 순간들이 모여 우리는 그곳을 계획보다 먼저 나가겠다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마트를 한 번이라도 갈 수 있었다면 조금 더 평화로웠을 그곳에서의 생활은 많은 교훈을 주었다. 그때부터 였을까. 벤을 타고다니는 여행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비상식량을 챙겨다니자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 어디서든 불을 쓰지않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챙겨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선택한 부족함은 나에게 좋은 수련이 되지만 주도권을 뺏긴 부족함은 고난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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