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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량되는' 것과 '성장하는' 것의 차이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우생학

우생학을 넘어서 교육의 이데아를 항하여


   마블 코믹스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에는 사이보그화된 신체를 지닌 ‘네뷸라(Nebula)’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언니보다 강해지기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아버지 ‘타노스(Thanos)’에 의해 ‘눈과 뇌가 꺼내지고 기계로 대체되는’ 고통 속에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는 불우한 유년 시절 때문에 하나뿐인 언니를 원망하고 세상을 경멸하게 되었지만, 바로 그 유년 시절 덕분에 모두가 두려워할 정도의 전투 능력을 얻기도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LTTxW8SFHds

네뷸라의 유년시절과 언니와의 관계를 그린 영상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그의 신체를 기계로 대체해 버린 타노스의 양육 방식을 ‘교육’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뷸라가 겪어야 했던 고통을 떠올리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합리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교육’의 이름으로 용인하는 관행들을 살펴보면 타노스가 네뷸라를 키워낸 과정과 유사한 모습들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학생들이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정도만 다를 뿐 ‘네뷸라’의 정체성을 내면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이들은 ‘경쟁 사회 속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고, 어른들은 ‘사회 계층이동의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아이들의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지 않던가? 아이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버린 사회에서는 어쩌면 타노스를 위대한 교육자로 칭송해야 마땅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유전적 개량을 지지하는 현대판 우생학이 설득력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나치정권의 만행으로 대표되는 과거의 우생학과는 달리, 오늘날의 우생학 모델은 국가의 강제적인 개입을 배제하고 유전적 강화를 부모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기 때문에  ‘자유주의 우생학’이라고도 불린다. 이 자유주의 우생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교육으로 아이의 능력을 개발하는 것과 유전자 공학을 통해 향상하는 것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가령 의료윤리학자 니콜라스 아가(Nicholas Agar)는 자녀의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일에 부모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되듯, 부모가 유전자조작을 통해 자녀의 선천적 능력의 용량을 증강하는 행위도 윤리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정창록, p. 86 참조). 자녀에게 하루 10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시키는 부모님이나 자녀가 피아노를 잘 치도록 유전자를 개량하는 부모님 사이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이 자유주의 우생학의 정당성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을 과도하게 통제하고 관리하는 교육 트렌드의 폐해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애초에 한 인격을 배움의 주체로 존중하지 않고서 교육을 논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학생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장려하지 않고 그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려는 모든 시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통제하려는 욕망의 정점에 놓인 우생학은 교육의 이상적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온몸으로 꽃피는 나무란


   교육이 추구해야 할 ‘이데아’는 무엇인가? 성숙한 스승은 자신의 제자를 수동적인 객체로만 파악하면서 그를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재단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배움에 임하는 주체 안에 모든 가능성과 잠재력이 내재해 있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체의 필요들에 응답하되 그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성장은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배움의 주체는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를 질문하면서 동시에 ‘이 세계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 질문을 품은 채 미래의 ‘나’와 이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가면서 쇄신을 거듭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도 하나의 무한한 세계였음을 깨닫는다.


   이때 ‘나는 누구인가’의 물음을 박탈당한다면 ‘성장’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대신 누군가가 미리 설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서 무의미한 ‘경쟁’을 펼치게 된다. 모두가 단 한 가지 트랙 위에서만 뛰기를 강요당하는 맹목적인 레이스에는 승자의 덧없는 기쁨과 패자의 좌절도 있지만 결국에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엄습하는 공허함이 있다. 틀에 맞추어진 획일화된 삶 속에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신만의 고유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주체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


   성장하는 주체의 질문을 박탈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한 교육자는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시적인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한다. 시적인 마음가짐이란 한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것이다(박찬국, p.12 참조). 그리고 기다림이 있을 때 스승은 비로소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꽃을 피우는 존재의 경이로움과 마주할 수 있다. 마치 꽃피는 나무를 목격한 황지우 시인처럼 말이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온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겨울나무로부터 봄 나무에게로』 중에서

(황지우 지음)


   시 속의 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기 온몸’으로 꽃을 피워내었기 때문이지 유난히 키가 크다거나 꽃이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필요 이상의 화학비료를 쏟아붓거나 최첨단 유전 공학 기술을 이용해서 ‘슈퍼 나무’로 개량해 내더라도, 자기 온몸으로 자라나는 과정이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죽어있다. 교육은 씨앗이 스스로 생장할 수 있도록, 의미를 찾아 나갈 수 있도록 조력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자처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박찬국,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파주: 21세기북스, 2017.

정창록, <의료분야 유전기술 발전에 따른 도덕적 정당성 논쟁에 대한 고찰>, 《생명, 윤리와 정책》 1,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2017, pp.79-108.

황지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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