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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아이 Mar 18. 2024

가족의 리프레시

전국투어 시즌2

2월 한 달은 가족과 함께 전국여행 시즌2를 진행했다. 매년 계획하고 진행하는 여행은 아니지만 지난 2022년 첫 전국 여행을 시작하고 올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다시 시도한 여행이다.


나는 사업을 몇 년째 해오고 있었는데 특성상 평일에는 서울에서 보내고 주말에야 제주 집으로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흔히 주말부부라는 것을 몇 년째 해오고 있었다. 주말부부의 시간은 제법 오래 이어져갔고 그 시간만큼 내 몸과 마음도 차츰 지쳐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혼자 야근을 하고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집집마다 들리는 아이들 목소리나 저녁식사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릴 때면 정말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으며 터벅터벅 걸었던 적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그렇게 해를 거듭 넘기며 일을 계속했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성취감과 보상은 크게 돌아왔기 때문에 버텼는지도 모르겠다. 그 보상을 집으로 가지고 돌아갔지만 가족은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저 내가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코로나가 덮쳤을 때에도 주말에도 어김없이 마스크를 쓰고 비행기를 타고 가족을 찾았다. 아내는 아이들이 코로나가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도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선배가 "우리는 걸어 다니는 ATM 기계야"라고 술을 마시면 자주 내뱉었던 말이 생각난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나도 그 선배의 말처럼 되어 있었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 지난 2023년에는 추진 중인 사업 하나가 해외에서 진행하게 되면서 나는 한 해의 절 반 가까운 시간을 유럽에서 보내게 되었다. 홀로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지내다 보니, 내 몸 어딘가에 병이 곪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이젠 정말 쉬고 싶다.' 생각을 간절히 했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무작정 쉬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고민을 얼마나 했던가. 하지만 절차는 아주 간단했다. 폐업신청서를 작성하고 제출하니 끝이란다. 물론 필요한 세무문제등은 복잡하게 남아있었지만 정말 누구 말대로 간판을 내리니 끝이난 것이다. 모두가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들떠있던 시기에 나는 갑자기 무직 상태가 되었다. 나이 마흔에 들어 그런 결심을 한 나도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보라고 응원을 해주었다.



아내는 모든 일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선뜻 여행을 제안했다.

“마음도 추스르고 생각도 정리할 겸 우리 한 달 동안 여행 다녀오면 어떨까? 마침 아들도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추억도 만들 겸 말이야.”


아내가 결혼 후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마도 내가 아내에게 퇴사를 종용했던 것 같다. 태교와 출산에 집중하는 게 어떨까? 이런 이야기였던 듯싶다. 아내는 얼마나 심란했을까? 당시 다니던 직장에서 탄탄대로의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이나 하라고 했으니 말이다. 아내는 결단이 빠른 사람이다. 이내 퇴사를 했고 우리가 말한 대로 첫 아이 출산에 노력했다. 그리고 두 해가 지나 둘째 아이도 출산을 했다. 우리에게 2년 지기 아들과 딸이 생겼다.


경력이 단절된 아내는 왜 속상하지 않겠냐고 점점 사회와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간다고 말을 했다. 그럼에도 항상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갔다. 기회가 생길 때면 어떻게든 프리랜서로 일을 하려고 했고 오히려 그럴 때마다 가족을 돌보는 일에 더욱 최선을 다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곁에 있어주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내는 아이 둘을 키웠고 올해 첫 째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아이들이 계속 커가면서 우리는 늘 변화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럴 때 일 수록 나는 영상전화 넘어로만 봐오곤 했다. 그런데 이젠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서 가족을 구석구석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늘 그(가족) 경계 어디엔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가 말한 '여행'은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리프레시’가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평소 산에서 느끼는 기운을 좋아하는 아내는 여행하는 동안 ‘전국 휴양림 탐방’이라는 테마를 정했다.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쉼과 사색을 즐기자니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출발하기까지는 두 달 남짓 충분한 준비 기간이 있었지만 전국을 돌아보는 긴 여정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생각만큼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먼저 휴양림들을 찾아보고 우리가 원하는 조건의 숙소를 엄선하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이동경로와 맞아떨어지는 휴양림을 골라서 숙소를 예약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곳은 예약을 받기 전이거나, 어떤 곳은 휴무일에 겹치기도 했고, 또 어떤 곳은 이미 예약이 꽉 차있어 대기예약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생각했던 여행 경로가 조금씩 변경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내는 두 달 동안 매일 지도를 펼쳐놓고 휴양림과 이동경로에 대한 정보들을 최대한 수집하고 조정해 나갔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여행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 26박 27일의 여행 경로를 완성하였다.


제주(출발) → 완도 → 강진 → 진도 → 변산 → 안면도 → 서울 → 속초 → 대관령 → 경주 → 김해 → 해운대 → 김해 → 사천 → 순천 → 완도 → 제주(도착)


아내가 여행 경로를 계획하는 동안 나는 나대로 짐에 대한 고민을 (하기는)했다.

지난 2022년 처음 전국 여행을 할 당시에는 트렁크에 갖가지 짐과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싣고 다니며 끙끙거렸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사실 캐리어가 무거워도 이동하는 데는 편리할 수 있지만 드르륵 끌고 다니는 모양새가 나는 싫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는 절대 캐리어를 갖고 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했다. 게다가 나는 캐리어가 왠지 날것에 대한 느낌이 덜하다고 해야 할까(날것은 무엇일까)? 방랑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짐을 정리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캠핑 용품점에 가서 가방과 박스들을 구경했다. 첫 번째 매장에서는 별 소득 없이 두 번째 매장을 찾았다. 마침 커다란 박스 형태의 가방들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 사막 색상의 커다란 가방이 눈에 딱 들어왔다. 손잡이와 어깨끈도 튼튼하니 두 개 정도면 우리 가족 네 명치 옷은 거뜬히 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점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트렁크에 실어서 공간을 확인해 보고 아내에게 보여주니 흔쾌히 오케이를 해주었다.


어느새 출발이 일주일 안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거실에 한편에 쌓인 채 비어있는 가방들을 보며 속이 답답했는지 병장님의 가르침을 하사했다. 난 그제야 가방을 들고 트렁크에 실어보며 배치를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사진까지 찍어서 내가 생각한 그림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나서 아이들에게 가져갈 옷가지와 물건들을 담도록 했는데 불길한 예감과 함께 문제는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내 딴에는 겨울이다 보니 옷도 두껍고 장기간이고 해서 가방 두 개를 산 건데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이다. 나는 고민을 빨리 끝내려고 아내에게 조용히 두 개 더 살까? 말을 꺼냈다가 참다못한 아내는 다시 병장님의 기운으로 캐리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캐리어는 마법과도 같이 네 명의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빨아들였다. 결국 날것에 대한 감성을 해치우고 트렁크에는 캐리어가 실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니 출발이 바로 다음날이었다.

장기간 비울 집을 정리하고 새벽배를 타기 위해 서둘러 잠을 청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눈만 깜빡한 것 같았는데 떠날 시간이 되었다. 이른 새벽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차에 올라타며 아내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는 있지?”라고 바로 물었다. 나는 뜨끔했지만 알아봤던 기억을 더듬으며 “응! 여객 터미널로 가면 돼”라고 말은 했는데 속으로는 왠지 불안했다.


캄캄한 새벽 제주항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간판이 환하게 보였는데 무슨 여객터미널이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속으로 ‘아 저기구나!’ 싶어 잽싸게 좌회전을 하며 들어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한산하여 나는 말 못 할 불길한 예감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우리 같은 일행의 차가 한 두대 먼저 들어왔는지 삼삼오오 사람들이 보였고 마침 터미널 방송에서 완도행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평일이니까 그런가? 생각하며 안도했지만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찜찜해하기는 마찬기 지였다. 아내는 서둘러 아이들과 안으로 들어간다고 나 보고는 차량 선적을 하러 가라고 했다. 차량 승선 마감시간이 임박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헤어지고 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오래지 않아 발생했다. 나는 바로 옆의 부두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며 정문에 있는 직원에게 물었더니 여기가 아니고 몇 블록 더 가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몇 블록이라고? 나는 차를 돌려 가는 동안 가족과 점점 멀어지는 게 이거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내는 좀 걸어가면 된다고 안내를 받았으니까 일단 차부터 잘 승선하고 오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일단 차를 배에 승선을 하고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배에서 걸어 나왔는데 바로 앞에 커다란 건물에 ‘제주 국제 여객터미널’이라는 간판이 딱 걸려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그렇다. ‘애당초 우리가 왔어야 할 터미널이 저거구나.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 터미널에는 사람들이 가득 있었고 이미 승선을 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었다. 개찰구 직원이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말을 해주었다. 나는 그 터미널에서 홀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비가 오고 있었지만 밖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기다렸다. 아내는 걸어오는 중간에 다행히 셔틀버스를 탔다고 했고 승선 마감시간을 1분 정도 남겨놓은 상황에 겨우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마 그 셔틀을 타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캄캄하기만 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완도행 배에 탈 수 있었다. 준비성이 부족한 나의 천성을 어찌할지는 내 몫이지만 배가 출항해 완도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27일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 즐기다 온 것 같다.

아직은 2월이라 차가운 겨울 날씨 탓에 회색빛으로 물든 날이 많았지만 보이는 대로 좋았고, 때때로 화창한 날씨가 반가워 좋았다. 서울을 거쳐 속초를 지나 7번 국도를 달리고 있을 때 광활하게 펼쳐진 동해바다를 보고는 쉬웠다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파란 겨울하늘 아래 나란히 펼쳐진 망상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동해바다는 아내와 연애할 때의 풋풋한 기억과 함께 기분 좋은 감정들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음식을 먹는 재미 또한 빠질 수 없었다. 나는 일명 ‘막걸리 도장 깨기’라는 것을 했는데 가는 곳곳마다 동네에서 주조하는 막걸리들을 빠지지 않고 마시며 원 없이 술을 즐긴 것 같다. 웬만한 음식들은 요즘 제주에서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만 안면도에서 먹은 맛조개 그리고 강릉에서 먹어본 청어회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와 아이들은 아내의 음식 솜씨에 길 들여 저 있기 때문에 밖에서 외식을 해도 항상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아내는 여행 내내 지역 마트를 빠짐없이 돌아보며 장을 보았다. 대관령에서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뜻하지 않게 고립되던 날은 아이들은 엄마가 해준 음식을 먹으며 눈놀이 한 날이 제일 즐거워 한 날 중 하나였다고 한다.


길게만 느껴졌던 2월의 여정은 어느덧 막을 내렸다. 

준비할 때는 그렇게 설레고 멀게만 느껴졌던 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가 정말 다녀왔나 싶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이런 여행이 우리 삶에 얼마나 있을까 싶다.

여행을 마치고 모두가 자기의 일상으로 재 빠르게 적응한다.

큰 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여 아침 7시 30분이면 버스를 타고 간다. 아내와 나는 그 보다 더 이른 새벽 요가를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딸이 등교를 한다.

여행은 새로운 전환점을 찾아주는 좋은 방법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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