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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아이 Apr 01. 2024

을지로의 기나긴 인연들

을지로 선배들

나의 전화기는 거의 울리지 않는다. 

잠시 내가 있던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요즈음, 그 시간이 흐를수록 전화기도 제 주인을 닮아가는지 조용해진다. 가끔씩 어디 있는지 혼자 차에 있는지 모를 때가 더러 있는데 서로에게 무관심이다.

대부분의 외출이 수영장과 도서관 말고는 없는데, 아내도 그 시간에는 연락을 하지 않는다.

부모님은 나보다 며느리인 아내에게 연락을 더 자주 하시기 때문에 특별히 걱정해야 할 연락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려온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연락하는 P선배,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선배는 "텔레그램 좀 봐요 부고문 보냈어요". 선배는 아직도 열 살이나 어린 나에게 존대를 한다. 알고 지낸 세월이 15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도 말이다. 서울에서 일하는 20여 년 가운데 거의 전부를 ‘을지로’에서 보냈다. 내가 한창 직장인으로서 꽃을 피워야 시기에 나는 오랜 시간 P선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그와 함께 비워낸 소주병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배는 술이 약했다. 소주와 치킨을 시키면 소주만 들이켰고, 어묵탕과 소주를 시켜도 소주만 마셨다. 술자리에서는 가능하면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기-승-전-회사’로 마무리되었다. 그러고 나면 늘 취해있었다. 그렇게 을지로의 어느 치킨집과 골뱅이집에서 늘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되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나만의 회사를 만들기를 원했고 마침내 그럴 수 있었다.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P선배가 속해 있고 내가 떠나온 회사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나는 다시 을지로를 오고 갔다.

그러고 나서 나는 독일로 그러고 나서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작년 가을, 선배는 20년이 넘도록 다닌 회사를 이제 그만두어야 할 때 라며 연락이 왔었다.

나는 선배가 선택하려는 결정에 대한 내 경험을 보태어 대답을 해주었다. 결국 그 해 선배는 을지로를 떠났다.


선배는 내 근황이 궁금했는지 물었다. 나는 내 하루의 일상들을 말해주며 ‘도서관’에 가는 게 좋다고 했더니, 자신이 출근하는 회사가 마치 도서관 같다고 했다. 출근해서 자기 일만 묵묵히 하고 그러다 조용히 퇴근한다며 말이다. 그러니 도서관 같다고 웃으면서 나보고 뭐라도 배워보라며 말을 해주고는 통화를 끊었다.


나는 선배에게 부고문이 뭐냐고 물어보려다가 지워져 있던 메신저를 다시 설치했다. 

쌓여있는 알림 중에서 P선배가 보냈다는 부고문을 확인했다.


부고문에 적힌 상주는 함께 일했던 직장의 임원분이었다. 그분은 P선배가 신입사원으로 왔을 때 과장으로 계셨다고 했다. 내가 그 팀에 합류했을 때는 차장이었다가 팀장을 거쳐 임원을 지낸 후 대부분 그렇듯 퇴직을 하셨다. 그 후 새롭게 출발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P선배에게 연락을 했었던 모양이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P선배가 퇴사를 결심했다고 내게 연락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반신반의했었는데, 그분의 제의가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떠날 결심이 섰던 게 아닐까 말이다.


그분은 나와 꽤나 신기한 인연이 있기도 했다. 언젠가 오래전 친척 결혼식에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어디서 많이 보았다 싶은 사람을 마주했는데 바로 그분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분도 나를 보고 깜짝 놀라 눈을 껌뻑이고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멋쩍은 듯 헤어졌는데, 다음날 출근했더니 친척 집안과 아재나 당숙 뭐 그런 정도의 사이라고 알려주셨던 것 같다.


지난가을 끝 무렵 프랑스에서 귀국한 나는 그 분과 인사를 나눌 자리가 있었다.

여러 말을 나누며 격려를 해주시고는 말끝에 P선배를 데려와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정 때문에 제주도로 바로 와야 했기에 결국 P선배는 만날 수 없었고 다음을 약속한 것이 아직이다.



모처럼 울리지 않던 전화기가 P선배 때문이었을까, 다음 날 다른 을지로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떻게 알았는지... "직원들이랑 이야기하다 네 이름이 불쑥 나와서 목소리도 들을 겸 연락했어"라고 말하는 L선배.


을지로 인연은 계속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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