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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흔아이 Apr 16. 2024

신촌의 버스 운전기사

어느 평일날 아침,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아내도 외출을 했던 터라 혼자 있는 날이 되었다.

딱히 나갈 일도 없었는데 오전 볼일을 마치고 나니 왠지 외출이 하고 싶어졌다. 

보통 사람들은 점심시간에 서로 만나서 밥도 먹고 하는데, 가족 말고는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나온 터라 나에게는 딱히 그럴만한 '무엇'이 없는 것 같다. 나가서 그냥 눈에 담고 싶어 어쨌든 버스라도 타고 나가야지 하며 향한 곳이 결국 또 도서관이다.


정오의 버스는 텅 비어있었다. 기사님은 느긋한 성격이신지 급할 게 없다는 듯이 천천히 운전했다. 너무나 편했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분명 운전하면서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또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가만히 기사 아저씨와 창밖을 번갈아 보면서 문득 아버지와 어린 내 모습이 생각났다.


지금의 나보다 부모님이 더 젊으셨을 1980년대의 그때, 그 시절에 아버지는 버스 운전을 하셨다. 

나는 염리동에서 자랐는데 엎어지면 이화여대가 코에 닿을 거리에 있는 동네다. 어머니는 종종 나를 데리고 신촌역에 나가 아버지의 버스를 기다리셨다.


당시 그곳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위가 한창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었다. 버스를 타러 갈 때면 최루탄의 매운 냄새 때문에 눈물과 콧물이 마르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는 참 대단하셨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그 연기 속에 나가실 생각을 하셨으니 말이다. 그땐 그게 일상이었겠지 생각하면서도 그 격동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모두가 치열하게 살았던 세대의 놀라운 헌신들...


버스를 타면 어머니는 창밖으로 보이는 간판의 숫자나 글자들을 따라 읽어보라며 가르치셨다.

나는 그렇게 한글을 배웠다고 했는데, 동그란 원 안에 적힌 숫자와 버스 정거장의 글자들을 따라 읽어내면 웃고 계시던 어머니의 얼굴이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서 초등학교 저학년이 되어있을 때에도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버스를 타기 전에 가끔씩 '경양식 레스토랑'이라고 적힌 식당에 데리고 갔는데, 검은색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키가 큰 아저씨가 주문을 받고 음식을 들고 나왔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을 먹으며 포크와 나이프를 잡는 요령을 배웠다. 그렇게 배가 부르고 나면 버스를 탔는데, 그런 날은 좋은 날이었다.


가끔씩 아버지의 운전석 바로 뒷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운전석 위로 커다란 거울에 비췄던, 레이반 선글라스를 낀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내가 좀 더 커서는 혼자서 버스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여름이면 마포대교를 건너는 버스를 타고 여의도를 갔고, 가을엔 남산도서관 가는 버스를 탔다. 어느 곳은 전철이 더 수월했음에도 버스를 갈아타며 다녔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더 지났을 때다. 아버지가 지하철 기관사라는 선배와 지하철을 타고 갈 때였다. 내 눈에는 똑같은 노란색 종이에 갈색 마그네틱 선이 그어진 어김없는 450원짜리 보통권이었는데, 선배는 그 표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고 했다. 바로 무제한 승차가 가능한 표라며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설마 그런 게 어디 있느냐고 했지만 선배를 따라다니면서 출구를 나올 때마다 다시 뱉어내는 승차권을 보면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순진했던 나는 아버지에게 그 승차권 이야기를 했고 버스에는 그런 게 없는지 여쭈어봤는데,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셨다.


아버지는 공무원이 꿈이라고 하셨는데, 어쩌다 보니 운전을 업으로 삼아 지내셨다. 어릴 때 강원도 시골에서 홀로 상경해 일을 하면서도 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공부할 형편이 되지 못했지만 다달이 받는 봉급을 쪼개며 책을 사서 보셨다고 했다. 일하는 가게의 주인집 딸이 과외받는 것을 보고는 선생에게 공부할 수 있는 책을 추천받아가며 혼자서 공부를 하셨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도 그런 과외가 있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분명 성실히 일하셨을 사람인데... 그런 아버지에게 주인집 아주머니라는 사람이 사기를 쳤다고 했다. 월급을 자기에게 맡기면 나중에 학비에 보탤 수 있도록 이자까지 쳐줄 테니 하고는 그렇게 몇 달이고 몇 년이 흘렀는데, 호락호락한 세상이 아니기에... 아버지는 그동안 맡겨둔 돈과 방 한 칸까지 모두 떼이고 나서 학업을 포기하셨다고 했다. 그러고 나니 당장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배웠던 운전실력으로 대형 면허를 따고 버스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세월이 흐른 지금 어느 동네에서 작은 마을버스를 운전하신다. 

아버지의 손주들이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싶다며 따라가서는 신나며 버스를 탄다. 

신촌의 그 레이반 운전기사님은 아직도 여전하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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