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종종 부도덕한 일을 저지르고 쾌감을 느낄 때가 있다. 학창 시절 때는 가장 즐거웠던 게 수업 시간에 몰래 피자빵을 먹으며 웃음을 참는 일, 체육시간 중에 배가 아프다고 하고 친구들과 체육관 구석 매트리스에 숨어서 쉬는 것, 책상 위를 샤프로 파서 흠집을 내는 것 등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그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런 행동을 하라고 해도 귀찮아서 하지 못하겠지만, 10대 시절 나름의 즐거운 일탈행위였다. 이러한 즐거움은 사람들마다 차이가 큰 편이고 개인 편차도 심하다. 당시 공부와 거리가 멀던 친구들은 오토바이를 타거나 술을 마시거나 비행 청소년의 행동을 하며 자신들의 일탈 행위를 무용담처럼 늘어놓곤 했다. 얼마나 무서운 언니, 형들과 만나 술을 마시고 오토바이를 탔는지 자랑을 하는 아이들의 얼굴엔 묘하게 흥분감이나 즐거움과 함께 '학주(학생주임)'에게 걸리면 죽는다는 너스레와 두려움도 섞여있었다.
나는 이렇게 굵직하고 추후 어른들에게 추궁을 당할만한 귀찮은 행동보단, 소소한 배덕감을 즐기는 행위가 훨씬 즐거웠다. 내가 행하는 소소한 일탈행위는 그 누구의 눈에 띄어도 크게 관심을 받지 않고,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이걸 재미로 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재밌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었던 나는 문제 행동을 하다가 선생님이나 반장, 부반장 같은 친구 눈에 띄어도 대부분 "배고팠나 보네", "피곤해? 괜찮아?", "스트레스 많이 받아?" 이런 식의 걱정 어린 관심과 격려를 받곤 했다. 그럼 겉으론 "히히"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론 '일부러 했는데, 후후. 아무도 모르네.'라는 생각을 하며 아주 즐거웠다. 가끔 이런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엔 이런 마음을 설명할만한 말재간이나 설명해도 딱히 알아줄 것 같은 친구나 어른들이 없었다. 그리고 말해봤자, 분명 그런 짓을 왜 하냐는 잔소리를 들을게 뻔해서 조용히 함구하며 꾸준히 장난스러운 일탈행위를 하곤 했다.
귀여운 것을 바늘로 찌르고 싶다던지...
이러다 17살, 우연찮게 친구 따라 시험을 치고 합격한 뒤 물 흐르듯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오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나가며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고교 시절에는 선생님들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평판이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몸을 사리며 지냈다. 고등학교 1학년때 미국에 온 만큼 다른 미국 현지 학생들과 경쟁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해서 더욱 긴장감 속에서 지냈다. 당시엔 미국에 처음 왔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내가 무언가 해내고 싶다는 피상적인 성공 목표를 가지고 무작정 공부를 해나갔다. 그리고 당시 가정 불화가 심한 집구석을 도망 나와 빨리 나 혼자서 내 한 몸을 건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살면서 가장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던 시기였다.
공립 교환학생 시기가 끝나면 사립 고등학교를 진학하거나 한국에서 자퇴 후 검정고시를 친 다음 미국 대학 입시로 바로 넘어가거나 다시 한국 고등학교로 복귀해야 하는데, 내 앞길을 정하는 것이 당시엔 참으로 불투명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인생이 어찌 될지 모르니, 당장은 담당 선생님의 추천서가 중요했다. 꽤 잘 사는, 사업체를 운영하던 부모 밑에 투자하기 아까운 딸, 장녀로 살던 나는 집이 유복해도 나 자신은 가난했기에 돈을 달라고 할 수가 없어 자퇴를 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불확실하던 시기라 스트레스와 눈치를 보느라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미국 선생님들한테 잘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남아서 채점도 도와드리고, 가방도 들어드리고, 여러모로 한국에서 학창 시절 즐기던 일탈 행위들은 미국에선 올 스톱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미국 생활의 첫 시작이었던 고교 시절의 즐거운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텍사스의 뜨거운 석양을 보며 혼자 호스트 가족 집에 걸어오던 기억만 남아있다. 나름 친구들도 만들고 적응도 꽤 잘해나갔지만 당시 정해지지 않은 앞날과 내 또래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 항상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어쨌든, 소소한 일탈과 배덕감을 배제한 나의 고교 생활은 겉으로 보기엔 무척 순조로웠고, 학과 성적도 좋았고, 대학과목 선이수제(Advanced Placement, AP)라는 성적 우수 학생들이 듣는 수업도 여러 개 이수했다. 1년 단기 미국 국립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치곤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게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선생님들이 자신의 이메일, 전화번호, 집주소도 알려주시며 언제든지 필요한 추천서가 있음 연락을 달라고 하실 정도로 한 해는 잘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당연히 사립 고등학교 진학은 비용적인 문제로 고등학생인 내가 해결할 수 있을 수가 없었고, 장학금을 알아보았지만 생활비가 빠듯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귀국한 다음날, 나는 직접 교육청에 찾아가 빠르게 셀프 자퇴처리 후 그 주 주말 동네 고등학교에서 치러진 한국 검정고시를 한 번에 통과한 다음 미국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사립 고등학교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돈 없다. 너네 동생 과외비랑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든다. 장남이 중요하지."라는 말을 들었을 땐, 실망감보단 빨리 자퇴처리하고 시험치 길 잘했다고 스스로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지금도 인형 옷 만들기를 좋아한다. 사실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보단, 장난감 디자이너가 되었어야 했을지도...
그러고 당시 내가 좋아하던 인형 옷 만들기, 그림 그리기, 포토샵으로 디자인하기 등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패션 디자이너가 되면 되겠다고 생각해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나갔다. 한국 대학 입시와 미국 대학 입시를 동시에 준비해 나갔고, 포트폴리오도 당시 가고 싶던 대학교의 동문 카페에 물어물어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나갔다. 교환학생 시절 배운 영어로 직접 가고 싶은 대학에 전화해서 상담도 했고, 한국 대학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과 독서실을 혼자 전전하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불안하고 두려운 시기였지만 동시에 가장 미래를 기대하고 낙천적인 상상을 하던 때다. 소소한 일탈행위는 바쁜 일상 속에서 잊혀갔고, 공부, 입시,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모으던 나에게 배덕감이라는 느낌은 잊힌 지 오래였다.
나의 긴 입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고, 결론적으로 나는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 우여곡절 끝에 졸업 후 현재 미국에서 전공을 살려 33살의 의류 테크니컬 디자이너로 살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와 엔지니어의 사이쯤인데, XS사이즈부터 10XL까지 옷의 크기나 피팅을 보는 직업으로 패턴을 제작하고, 공장에서 제작 스케줄과 문제 사항을 풀고, 바지길이를 0.5"인치만 줄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생각보다 지루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내 직업에 관해서는 추후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어쨌든 현재 근무하고 있는 회사는 약 4년째 다니고 있으며 미국 미시간주에 본사가 있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이다. 지역 대표 기업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규모나 매출로 보나 대기업이다. 회사 창립자의 아들분이 상당한 지분을 가진 회사이며, 그분은 세계 200대 부자 안에 들기도 하는 굉장한 부자. 내 연봉 정도는 아마 그 집 잔디 깎는 비용도 안될 정도의 부자이신데, 여전히 주식 상장하지 않고 유한회사로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는데, 회사 건물을 통유리로 제작, 천장 고도를 높고 오픈된 세련된 형태로 지어 오버 좀 보태서 마치 실리콘 밸리의 IT회사 같은 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연봉이나 점심이나 실제 사원들이 사용하는 공간은 유명 테크 기업과는 견줄 수준이 안되지만, 최소한의 겉으로 보이는 건물이나 가구 정도는 살짝 그런 향기가 난달까.
살짝 IT 회사스럽지만 내실은 별로인 리테일 회사
높은 천장을 가진 통유리 회사 건물 속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구내식당. 바깥의 풍경이 보이고, 날씨의 변화가 눈에 띄며, 보기만 해도 숨 막히는 직장 동료들을 피할 수 있는 곳이라 지난 4년간 내가 가장 자주 들리는 공간이었다. 여기서 혼자 조용히 점심을 먹거나 늦은 시각 아무도 없을 때 앉아 업무를 보기도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같은 팀에 한국인 동료가 입사한 것이다.
그녀의 입사 소식을 알리는 단체 이메일에 적힌 이름은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다. 이름으로 추론하건대 40-50대 여성의 이름이었다. 상당히 친근감이 느껴지는 그분의 성함을 보고 미국계 한국인인지, 나처럼 토종인지 상당히 궁금했다. 왜냐면 성씨가 미국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배우자를 만나 바꾸었거나, 입양아거나, 아니면 미국계 한국인일 거라 생각했다. 그분을 처음 회사에서 보자마자 속으로 '아, 한국인이다.'라고 생각했다. 미국에 오래 산 한국 교민이라면 얼굴 표정, 분위기, 느낌만으로도 한국인인지 미국계인지 알 수 있다. 수 십 년을 살아도, 그런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분을 보자마자 한국인 같아서 반가운 마음에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돌아온 답변은 "Oh hello!"였다. 한국인 억양이 다소 섞인 유창한 영어답변에 살짝 당황했다. 나는 한국말을 알아듣는 거 같은데, 하면서 계속 한국어로 말을 걸었더니, 답변이 영어로 왔다. 웃긴 건 내 한국어 질문을 100% 이해하고 나오는 답변이었던 것이다. 주변에 미국인 동료들이 많아서 눈치가 보여서 영어로 대답하시는 건지, 단순히 한국인인걸 티 내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약간의 억양이 섞인 능수능란한 영어 실력은 미국에 오래 사셨나 보다,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막간의 대화를 마친 뒤,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도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고,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인 동료분이 찾아왔다. 그분이 주변을 한번 살피시더니, "한국 분이시죠? 아까 다른 동료들이랑 이야기할 때 보니 미국인인 줄 알았어요~"라며 너스레를 떠시며 반갑게 인사하셨다. 아, 아깐 눈치가 보이셨구나. 아까 영어와 한국어 대화와 달리, 반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퇴근을 했고, 자기가 자리 잡으면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 같이 밥을 먹자며 첫 만남을 마무리했다.
구내식당에서 통유리창 풍경으로 계절변화를 느낄 수 있다.
이 첫 만남을 이후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우리는 종종 수요일 오후에 같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나 서로를 알아가고, 한국인 동료가 있어서 좋다며 소소한 이야기를 했다. 수요일 오후의 점심은 월요일에도 같이 먹자는 이야기가 되었고, 곧 화요일도 같이 먹고, 출근하는 날 바쁘지 않으면 항상 점심을 같이 먹는 친한 동료 사이로 발전했다. 사실 한국이었으면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기 어려웠을지 모르겠다. 30대 초반인 나와 40대 후반인 우리는 한국에서 고향, 배경, 성향이 여러모로 다르다. 2,000명이 넘는 거대한 회사의 본사 건물에 한국인 단 2명이라는 특이점은 금세 가까워지기 충분한 이유였다. 한국인이 차고 넘치는 한국이었다면, 더 높은 잣대를 세우고 인연을 맺었을지 언정 미시간의 작은 동네 그랜드 래피즈에선 미국인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 자체가 특별했다.
나는 시카고에서 미시간 본사로 비행기로 출퇴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사 먹거나 햇반과 간단히 포장 소분된 반찬을 먹곤 한다. 이걸 보시던 내 한국인 동료는 자기가 점심을 싸다 주겠다며, 여긴 한인 마트 큰 게 없으니 종종 맛있는 떡이나 야채를 사다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뭔가 품앗이를 하는 느낌도 들고, 원래 나눔 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내겐 아주 즐거운 제안이었다. 가을에는 열무를 샀고, 겨울에는 얼갈이배추를 샀으며, 봄에는 봄동을 사갔다. 중간중간 한인마트에서 파는 반찬이나 장아찌, 각종 젓갈도 종종 밀봉해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면 꼭 다음날이면 오징어 진미채 볶음, 무생채, 미역국 등 집에서 먹을 법한 한식 반찬들을 싸 오셨다. 그걸 넓은 회사 구내식당 전자레인지에 데워, 계절감을 잘 느낄 수 있는 유리창 옆에 앉아서 먹으면 잠깐 행복이 몸을 감싸는 듯했다. 원체 먹는 걸 좋아하고, 평생 돼지로 살아온 내게는 점심때 별로 당기지도 않는 클램 차우더보다 콩 밥에 미역국이 기쁨을 주었다. 미국에 오래 살면 미국 음식이 익숙해진다고 하는데, 당연히 익숙은 하다. 그렇다고 당기지는 않는다. 익숙한 것이랑 먹고 싶은 거랑은 다르지 않나? 특히 미국 생활이 10년 차가 넘어가면 점점 더 한식이 당기는 것이, 여기 북미 땅의 기운이 한식의 맛을 돋우는 기운이 있나 느낄 정도로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던 배추김치나 콩자반도 어찌나 맛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이렇게 직장 동료와 근 6개월 넘게 점심을 같 먹다 보니 특이한 패턴을 발견했다. 유독 김치, 겉절이 종류의 반찬에는 두 세 겹의 랩핑과 항상 "냄새날 텐데, 호텔 가서 먹어요."라는 말을 멋쩍게 웃으면서 하시는 점이다. 그런데 미역국을 먹는데 어떻게 김치를 같이 안 먹고 버티는가. 이 외에도 고기반찬이나 전 종류를 그냥 먹기엔, 예쁘게 유리병에 담긴 김치나 겉절이를 바라보고만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뚜껑을 열어서 먹다 보면 항상 조금 당황하는 얼굴과 동시에 내가 맛있게 김치를 먹는 모습이 흡족하신지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조금 궁금해졌다. 그녀의 김치는 사실 냄새가 난다고 할 수 없는 아주 깔끔한 서울 김치에 가까웠다. 게다가 액젓이 아니라 소금만으로 깔끔하게 김치를 담았고, 겉절이에 가까운 김치들이어서 쉰 김치의 강렬한 냄새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요리 솜씨도 좋으셔서, 종종 한식 장사를 하고 싶다던 자신감의 근원이 이해가 기도 했다. 그런데도 항상 냄새를 걱정하심과 동시에 즐거워하시는 표정도 동반되어 그 양가적인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요새 미국 슈퍼에도 김치가 빠지지 않고 판매된다. 맛은 매우 이상하다.
날씨 좋은 어느 겨울날 점심, 가벼운 어조로 "김치 너무 맛있고 이 정도면 냄새나는 것도 아닌데요 뭐. 다른 미국 직원들 파스타 치즈 냄새가 더 강렬한 거 같아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실제 회사 내 또래 미국인 동료이자 흑인 친구가 매번 한식을 먹는 걸 부러워하며 자긴 낙지젓갈을 좋아한다는 둥 개인 취향을 밝혔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며 냄새로 걱정하는 이유를 듣기 위해 주절거렸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국인 동료는 "미국인 남편이 좀 냄새에 예민해서, 먹지 말라거나 이런 건 아닌데 항상 한식 요리를 하면 냄새가 강한 건 냄새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괜히 신경이 쓰이네."라며 웃었다. 그러고 나서는 "난 이렇게 같이 밥 먹으면서 맛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깨비누나 아니었음 나 혼자서 구석에서 먹거나 미국애들 먹는 음식 먹었을 거 같아. 고마워. 덕분에 점심때마다 한식 먹을 수 있어 좋아. 내 반찬 먹으면서 맛있다 하며 잘 먹어서 기분 좋아."라고 덧붙이셨다. 그날 점심도 역시 맛있었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앞으로도 진실되게 맛있는 그녀의 반찬과 정성을 감사드려야겠다 느끼며 내가 가져오고 나눌 수 있는 제철 채소들을 자주 드려야지라며 마음에 되새겼다.
나의 궁금증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그날 근무하는 내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의 행복한 점심이 단순히 배가 부르고 맛있어서 느끼는 감정 그 이상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회사에서 친한 미국인 친구, 동료들과도 맛있는 점심을 배부르게 여러 번 먹었으나, 포만감의 즐거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동료와 점심을 먹는 날이면, 왠지 모를 행복감과 묘한 즐거움이 아침 근무 시간을 이겨내게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이 감정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번뜩 떠오른 기억이 바로 학창 시절 친구들과 몰래 피자빵을 먹던 모습이었다. 차갑게 식어있던 매점의 500원짜리 피자빵은 사실 냄새나 향도 거의 나지 않았고, 맛도 그저 그랬으나 몰래 수업시간에 해선 안 되는 짓을 한다는 일탈행위, 배덕감의 즐거움이 더해져 말라붙은 치즈의 맛과 싸구려 소시지 향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그런 묘한 감정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며, 잊고 지냈던 십 수년 전 학창 시절의 기억 조각이 떠올랐다.
거대한 미국 대기업 내, 두 명의 한국인이 파스타나 샐러드가 아닌 밥, 김치, 장아찌를 먹으며 한국어로 떠드는 1시간의 해방감은 묘한 흥분감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어떤 미국인 동료도 눈을 찌푸리거나, 우리가 먹는 한식이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거나 얼굴 붉힐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맛있겠다거나 자기도 한식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건네어왔다. 그래도, 주류에서 벗어나는 행동은 항상 은은한 긴장감을 동반한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 김치가 얼마나 맛있는지 저들은 모르겠지라는 생각은 은근한 즐거움을 준다. 게다가 종종 김치 냄새나 한식 냄새가 심하다며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기사나 인터뷰를 인터넷에서 접하다 보면, 아름다운 구내식당에서 미국 미시간의 풍경을 보며 오이김치와 북어 미역국을 먹는 우리의 작은 테이블이야 말로 우리들의 '그사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회사라는 공간이 가지는 어른스러움과 평판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는 우리의 한식 점심 식사는 오히려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해 준다. 그 누구도 무식하며 다양성에 배타적인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 않기에 미국인 직원들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가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우리의 한식 점심 식사는 볕이 드는 테이블에서 1시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오버한다 하면 눈물 찌익 날지도... 따뜻한 댓글 부탁해요
미국에서 김치를 먹는 게 죄도 아니고, 대단히 잘못하는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생경한 음식의 냄새를 풍기며 점심을 즐기는 내게는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던 배덕감과 스릴감을 선사며 회사 생활의 몇 안 되는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도덕적으로 잘못한 건 하나도 없지만, 사회적으로 다수의 미국인들과 다른 음식을 먹는 것 자체가 왠지 즐거운 그런 장소가 내가 사는 이 나라이다. 오이김치 하나로 배덕감까지 느껴볼 수 있는 가성비 넘치는 곳, 바로 미국 회사 구내식당! 한국에 사는 분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 기가 차는 사람도 많겠지만, 오이김치 뚜껑을 열 때 묘한 긴장감과 스릴감과 다 먹고 다면 은근하게 일탈했다는 기분도 느낄 수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 속 소수의 한국인들로 살아가는 나의 일상생활.
우리만의 '그사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직이나 회사 밖 홀로서기를 고민하고 있기도 하고, 4년째 다닌 이 회사가 답답한 요즘. 나의 작은 우리만의 세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진 몰라도, 학창시절 잊고 있었던 작은 일탈감과 해방감을 김치와 한국적인 반찬으로 즐기고 있다. 요샌 미국 슈퍼에도 김치를 슈퍼 푸드라고 다양한 현지 브랜드들이 개발하고 있는데, 여전히 미국산 김치는 한국인 동료가 꽁꽁 랩핑해 가져다준 오이 김치나 얼갈이 배추 겉절이 만큼 즐거움을 주진 않으니, 언제 사라질 지 모르는 작은 일탈을 온전히 느껴야지. 다음주엔 뭘 가져다드릴까나. 내일, 한인 마트 세일 전단지나 확인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