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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Jul 26. 2024

15년 만에 다시 찾은 산티아고 대성당

36일 차 :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2023.11.15 수요

산티아고 순례길 36일 차


Santiago de Compostela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0.0km / 0시간 0분 / 비




오늘은 방전된 체력을 회복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한 날이다. 평소 보다 한두 시간 늦게 일어나 창밖을 보니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산티아고의 상징인 대성당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청명했다. 언제 또 비가 올지 몰라 파티 멤버들과 서둘러 성당으로 달려갔다.


어제 낮에는 비가 오고 날이 흐렸다. 비를 맞으면서라도 사진을 찍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일기예보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내일은 맑다고 하네요. 아침에 다시 오는 게 어때요?"


워낙 날씨가 멋대로 급변해 대는 탓에 일기예보에 대한 불신이 있었으나 속는 셈 치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오늘 비가 오나 내일 비가 오나 사진 배경이 어두운 건 마찬가지니까.'


예보는 다행히 맞아떨어졌다.


낮은 건물 뒤로 보이는 산티아고 대성당


포즈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단체 관광객들이 다가왔다. 한 손에 깃발을 든 인솔자는 우릴 가리키며 무리를 향해 무언가를 설명하듯했다. 왠지 자리를 뜨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서 있었더니 인솔자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부터 순례를 시작했나요?"
"프랑스 남부에 있는 Saint Jean Pied de Port(생장 피에 드 포흐)라는 작은 마을에서요."

"총 몇 km 걸었나요?"
"약 800km 정도 걸었어요."

"기간은 얼마나 걸렸어요?"
"35일 동안 하루도 쉬지 않았어요."


짧은 인터뷰를 마친 인솔자가 사람들에게 우리 대답을 전달하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설명을 마친 가이드는 우릴 향해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사진을 같이 찍어도 되겠느냐 물어보아 흔쾌히 수락했다.



촬영 후 몇몇과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들은 과테말라 출신이며 순례길 종주에 대한 아쉬움을 투어 관광으로 달래기 위해 이곳에 왔단다. 그중 누군가 내 손에 들린 끄레덴시알을 자세히 보고 싶다고 했다. 여권을 건네주자 길게 펼쳐 한참을 보더니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쑥스러움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돌려받고서 처음으로 끄레덴시알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첫날부터 방문한 모든 숙소와 음식점에서 도장을 찍어 빈칸 없이 꽉 채워져 있었다. 지난 한 달간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기록물이자 순례길을 걸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35일 동안 이렇게 많은 곳을 거쳐 여기까지 왔구나.'


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다들 감탄했는지,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숙소로 돌아가 된장국으로 아침 식사 겸 해장을 했다.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깔끔히 마치고 동료들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시O님과 보O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내일부터 Fisterra(피스떼라)를 향해 걷지만 다른 사람들은 언제 다시 보게 될지 알 수 없다. 인연이 닿는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쾌적하고 독립된 공간에서 쉬고 싶은 마음에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을 예약했다. 운 좋게도 한 시간가량 일찍 체크인할 수 있어 가방만 놓고 곧장 다시 밖으로 나갔다.


산티아고 시내와 대성당 주변을 돌아다니며 도시를 구경했다. 기념품 가게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었다. 사고 싶은 게 많았지만 아직 100km나 되는 여정이 남은 관계로 가방 무게를 늘리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냉장고에 붙일 자석과 엽서 두 장을 구매했다.


언젠가부터 가족 중 누군가 해외를 나가면 한국에 있는 다른 가족들에게 엽서를 보내는 것이 소소한 전통이 되었다. 내 방 서랍에는 부모님과 동생이 여러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들이 한가득 있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시키고 앉아 엽서 뒷면을 채워갔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얼마간 휴식을 취한 후 저녁거리를 사러 나갔다. 메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닭튀김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우체국이 있어 낮에 쓴 엽서를 한국으로 부쳤다. 음식을 포장하고 복귀하는 길에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렸다. 손에 들린 소중한 치킨이 행여 젖을까 싶어 꼭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파티 때 다 못 먹고 남은 맥주가 있어 곁들였다. 튀김옷이 눅눅해서 기대만큼 맛있지 않았지만 치맥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내일은 산티아고를 출발하여 피스떼라를 향해 걷는다. 15년 전 잊지 못할 아름다운 기억을 선사 덕에 평생 그리워했고 결국 다시 찾아오게 만든 구간이기도 하다. 다른 이에게는 산티아고가 종점이지만 나에겐 시작점이라는 인식이 더 강한 것도 그 때문이다. 남은 100km를 아내와 함께 걷다 저 멀리 대서양이 보이는 순간의 감동을 공유하기 위해 그리도 오랜 세월을 지나 이곳까지 왔다.


어렴풋하게나마 뇌리에 남은 몇몇 풍경들이 있는데 다시 알아볼 수 있을까?

당시 묵었던 알베르게 위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연히 찾게 되어 같은 곳에 머물고 싶다.


회상에 빠져 기대와 설렘이 가득하다. 동시에 날씨가 좋지 않아 가시거리가 짧을까 봐 걱정도 되었다. 기상 예보를 한참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던 끝에 결론 내렸다.


'이번에 못 보면 다음에 다시 오지 뭐.'


다시 찾은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서. 왼쪽 사진이 15년 전 모습이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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