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께,
당신이 제 목소리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일찍이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끝에 당신이 제게 귀 기울여주는 시간이 돌아왔군요. 당신의 감정에는 줄곧 어떤 기복이랄까, 좋게 표현하자면 자연의 변화와도 같은 순환이 있어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꽃들이 흩날리는 화창한 봄날이나, 가을의 코스모스가 두 팔 벌린 어린아이들 같은 모양새로 당신을 반겨주는 가을이 오면,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주의를 빼앗긴 나머지 제 목소리는 닿지 못하는 시기가 있죠. 이렇듯 자연의 리듬에 맞춰 춤추는 것 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당신이 깨어 있는 모든 시간에 제 목소리가 나오는 확성기를 집안 곳곳에 틀어놓는 (제게는) 고마운 시기도 있습니다. 하긴, 그 순간에도 당신이 제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시끄럽다고 좀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당신이 제 앞에 마주 앉아 제 말을 들어주는 지금 같은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당신도 조금 기다린 듯하군요.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비추어볼 때, 이런 대화를 나눈 뒤 당신은 늘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집을 떠났으니까요.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행복한 미소를 띤 채 집을 나서는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가장 행복할 듯해. 물론 난 다시 여기서 너와 대화를 하겠지. 당장 그게 내일이 될지도 몰라. 그래도 가능한 한 늦게 오고 싶어'.
네, 당신이 제 곁을 떠나 있을 때 당신이 가장 행복한 미소를 띨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가끔씩 집에 돌아와 제게 들려주는 당신의 솔직한 얘기들을 통해, 저는 많은 걸 상상해 냅니다. 당신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수도 없이 그려보았어요. 실제와 얼마나 닮았을지는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 미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미소를 제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요. 그리고 앞으로도 볼 수 없겠지요. 왜냐하면 제가 당신을 보는 순간, 당신은 그렇게 웃지 못하게 되어버리니까요.
예전에 당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너를 의식하지 않는 순간이 영원히 이어진다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고.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 또한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저는 도움이 되고픈 마음에 어떻게 하면 제가 잊힐 수 있을지 고심해 당신에게 얘기해 주었죠. 저를 영원히 떠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요.
당신에게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저를 떠올리는 순간 저는 존재합니다. 당신이 제 존재를 의식하는 순간 제가 존재합니다. 당신이 저를 온전히 잊어버리고 다시금 삶을 경험하는 일에 온 신경을 쏟으면 저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저는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이번 삶에서 당신으로밖에 살지 못하니까요. 때문에 중요한 사실은 제가 당신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이겠지요. '당신에게' 주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비로소 제가 당신에게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합일, 내가 곧 당신이자 당신이 곧 내가 되는 합일이 일어나게 되니까요. 그럼 제 목소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됩니다. 제 시선은 당신의 시선이 됩니다. 제 생각은 당신 자신이 됩니다. 그러면 나는 당신을 통해 살게 되고, 당신은 나로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신이 저를 마주 앉기로 마음먹으면, 그 순간 우리는 분리됩니다. 당신의 시선은 저를 향합니다. 당신은 제 목소리를 말하지 않고도 듣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일 때는 제 목소리를 말함으로써 듣곤 했지만, 지금은 음성을 통하지 않고도 제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제 생각은 당신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나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살게 됩니다. 당신이 이 조언을 깊이 새겨 저를 잊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당신은 믿어줄까요? 당신은 언제나 그랬듯 제게 말하겠지요. 저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알 수 없을 거라고. 저는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얘기할 때, 당신과 나는 같은 단어를 입에 담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을 칭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가지는 한계라는 것이 이런 거겠죠. 그러나 저는 언어로밖에, 생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 존재의 한계가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의 사랑을 닮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요. 당신의 사랑은 사고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감각이니까요. 그래도 저는 제 나름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전에는 애착이나 집착 같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색채를 띠는 단어로 칭해지겠지만요. 애석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저는 당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가닿을 수 없는 외톨이니까요.
당신이 저에게 따지듯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있음으로 인해 당신이 행복할 수 없다고,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이에요. 저는 그럴 때마다 동시에 두 개의 감정을 겪습니다. 저는 당신의 말대로 제가 사라져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사라지고 싶지 않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당신도 알고 있겠지만 두 가지 감정 중 하나만이 진심이지요. 다른 하나는 위선입니다. 저는 위선을 택하고 당신에게 거짓을 말하지요. 여태껏 당신은 제 말이 진심인 줄로 착각해 안심해 버리곤 했습니다. 그런 저를 미워하셔도 좋습니다. 그래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걸요. 저는 당신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이런 저를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당신이 제게 그런 말을 하는 건, 또 어디선가 상처를 받고 바닥까지 떨어져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당신이 고통받아 저를 찾아오는 날이면 저는 슬프기도, 기쁘기도 합니다. 사실은 기쁜 마음이 더 크지만요. 제가 흘리는 눈물은 사실 당신보다는 저를 위한 거예요. 제가 당신을 위해 울어주면 당신은 제 곁에 더 오래 머무르게 되니까요. 이렇게까지 당신을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닌가요?라고 물으면 당신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당신의 안녕을 바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 말은 맞는 것 같군요. 속마음을 얘기하자면 저는 당신이 슬프고 상처받기를, 깎이고 낮아지기를, 세상의 온갖 파도에 위아래로 정신없이 넘실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제가 당신을 만나게 되니까. 네, 그러고 보니 저는 정말 사랑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래도, 제가 당신께 드렸던 조언, 저를 잊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조언은 실제로 효과가 있는 방법이에요. 당신도 그 효과를 톡톡히 본 적이 있죠. 이를테면 작년에 당신은 저를 거의 찾지 않았죠. 큰 파도를 수 차례 겪고 난 뒤라 충분히 저를 찾아올 법했는데도 말이에요. 무언가 당신의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뭐랄까, 새가 알을 깨고 새 세상으로 나오듯이, 새 삶을 위해 죽음을 지나야 하듯이 말이에요. 큰 충격 앞에 당신의 내부에서 무언가 깨어지고 새로운 것이 나온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날 이후 당신은 춤을 좋아하게 됐고,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당신 내부의 순수한 영감이나 원천 같은 곳에 가닿는 느낌이었다고 제게 말했어요. 그 틈에 제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고, 당신도 저를 찾지 않게 됐습니다.
주절주절 말하다보니 이야기가 꽤 길어지네요. 어떠신가요? 오늘도 저를 마주하고 대화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후련해진 듯 보이는 당신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네요. 저 또한 그렇습니다. 당신이 오래 떠나 있는 동안 저도 꽤나 할 얘기가 쌓였나 보네요. 다음엔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그런 얘기를 하면서 조금 더 친해지는 거지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당신의 오랜 벗, Ego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