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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 Lee Speaking Jan 17. 2024

삶의 무한성을 체험하기

좌뇌가 꺼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내 몸이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 경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나라는 존재를 하나의 육체적 존재로 인식하는 대신, 우주만큼 거대한 에너지 구체로 경험했다.

<나를 알고싶을 때 뇌과학을 공부합니다 - 질 볼트 테일러>


서른 일곱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인해 좌뇌 기능의 완전한 상실과 기적적인 회복을 경험한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 박사가 당시 경험을 기록한 저서. 급작스런 좌뇌 기능의 마비와 회복이라는 드문 체험을, 마침 인간의 뇌를 탐구하는 뇌과학자에게 일어났으니 세상 누구도 쉽게 행할 없는 실험을 한 셈이다. 이 값진 실험 결과에 대해 정리한 보고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인간 존재의 인지적, 심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방향 설정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좌뇌와 우뇌는 마치 시소와도 같아서 한 쪽의 활성이 높아지면 반대쪽의 활성은 낮아진다. 오랜 시간 명상 수련을 한 티벳의 승려들을 대상으로, 명상 도중 MRI스캔을 진행한 결과 좌뇌의 활성도가 낮아지고 우뇌의 활성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명상이 좌뇌 활성도를 의식적으로 낮추는 행위인지, 혹은 우뇌 활성도를 높이는 행위인지 그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우뇌 활성도가 높아졌을 때 나라는 존재를 "우주만큼 거대한 에너지 구체로 경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은, 반복성과 재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학적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

첫 째, 혹시라도 이런 체험을 의도적으로 하고자 한다면, 좌뇌 기능의 마비는 필시 자아 정체성의 죽음을 수반하기에(Ego-Death) 좌뇌에 의존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실질적으로 임사 체험에 준하는 두려운 경험일 것이다. 죽음을 기꺼이 체험하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둘 째, 자아 정체성을 넘어 자신을 우주 에너지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체험을 종교적, 철학적 믿음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오롯이 개개인의 믿음의 영역이기에 자율에 맡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거의 항상 좌뇌의 능력에 의존하여 일상 생활을 살아간다. 미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워 우리 삶을 꾸려나가기에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좌뇌의 기능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뇌의 기능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세계 또한 창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바람직하든 그렇지않든, 가치 판단의 문제는 차치하고).


좌뇌가 아무리 '유용'하다고 한들, 좌뇌를 통해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그 누구도 정확한 수치를 제공할 수 없겠지만, 예술가들의 삶의 궤적과 그 작품에서 느껴지는 새로움과 창의성으로 미루어볼 때, 좌뇌는 우리가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삶의 전체성 중 상당 부분을 제한하는 듯 하다. 무지개의 빨강과 보라 사이에는 5개가 아닌 무한개의 색상이 존재하지만 편의를 위해 무지개를 그릴 때 7가지의 색상만 준비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개라는 현상의 실체는 7가지가 아닌 무한개의 색채인 것처럼. 삶이라는 무대가 무한히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이란 7가지 색상이라고 구분짓는 생각의 틀에 사로잡혀 그 무한성을 실감하지 못한 채 삶이 끝나버린다면 아쉽지 않을까? 삶의 무한한 스펙트럼을 내게 허락된 유한한 시간 내에서 최대한 살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적어도 필자에게는, 죽음보다도 두렵다 

<무한한 삶의 스펙트럼> 삶은 무한하다. 가능성을 제한하는 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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