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 석박사 수료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다!'는 본인의 의지로 연구를 이어 나가는 건 너무나도 멋진 일이지만, 국내에서 발생한 이 현상의 이면에는 취업 불경기라는 안타까운 상황이 있다고 합니다. 저 또한 국내에서의 취업을 희망하고 있기에 남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저는 일반 사무직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엔 무슨 이유에서인지 고학력자들이 많습니다. 저희 팀 인원 5명 중 3명이 PhD 학위를 소지하고 있고, 그중 2명은 심지어 post doc까지 마친 사람들입니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회사를 몇 년 다니면서 새로 입사하는 직원들을 보니 PhD인데 인턴으로 들어와서 정규직 assistant가 되는 걸 보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렇게 고학력인데 인턴을 거쳐서 운 좋으면 겨우 entry position에 안착한다고?'
고작 학사 학위 하나밖에 없었으면서 entry position밖에 취업 못했다고 스스로 구시렁대던 때도 있었는데 제가 배부른 소리를 했었던 것 같군요. (지금 다니는 회사가 의료 관련 쪽이라 미국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력 버프를 상당히 받지 않았나 추측을 해봅니다.)
학위와 취업
둘러보니 다른 팀 사람들도 다들 최소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내 직원들 학력을 비율로 보면 최근에 막 대학을 졸업하고 계약직으로 입사한 직원 2명을 제외하고서는 석사가 50%, 박사가 50%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궁금해서 어느 날 생물학 PhD학위를 가진 옆 팀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나: "저기 있잖아,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혹시 네가 대학교에서 심도 있게 공부한 게 지금 하는 업무와 깊게 관련이 있어?"
옆팀 동료 R: "아니, 지금 담당한 업무는 생물학 관련해서 하나도 몰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 요즘 취업이 어려우니까 난 이걸로도 만족해."
이 상황은 비단 이 동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료 학술을 담당하는 저희 팀 라인매니저님만 봐도 분자 생물학 PhD에 post doc까지 하신 분이기 때문이죠. 작년 여름 전 직원이 함께 식사하는 편한 분위기의 자리에서 라인매니저님께도 물어봤습니다.
나: "님, 그렇게 공부 많이 했는데 그쪽 (생물학)으로 안 나간 거 아깝거나 아쉽지 않아요? 공부를 그렇게나 오래 했는데 우리 회사 입사할 때 entry level (assistant)부터 시작했다면서 여..."
라인매니저 W: "사실 나는 교수가 되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었어. 하지만 교수직은 자리가 몇 없고, post doc 때 내가 하던 연구가 제대로 안 풀리면서 결국 거길 떠나게 됐지. 과학자는 연구를 떠나면 갈 수 있는 곳이 워낙 적어서 아무리 낮은 포지션이라도 취업이 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여기서 바닥부터 시작했고."
학위가 높아도 많은 사람들이 entry level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교육기관에서의 연구와 일반 기업에서의 직무는 다르니 고용하는 사람입장에선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라인매니저를 포함한 제 동료들에겐 저희 회사가 첫 직장이고, 이들이 PhD를 마치고 처음 입사했을 때 다들 30대 초반이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팀은 entry level의 새로운 멤버를 구하는 중입니다. 어제 라인매니저 말로는 많은 지원서 중 추린 것이 20개 정도 되고,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 중인 후보 5명은 모두 PhD소지자라고 하더군요. 구인 공고지원 자격에는 '학사'라고 나와있지만 워낙 고학력 지원자가 많다 보니 학력순으로 줄 세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업무 능력과 학위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기에 PhD의 부재로 본인의 가능성을 피력할 기회를 얻지 못한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큽니다.
어딜 가든 사람을 볼 때 학위만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학문에 대한 순수한 탐구가 노동자로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변질되어 가는 흐름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가장 골치 아픈 건 이런 상황을 타계할 명확한 해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겠죠. 세계적으로 학력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는 와중에 개인으로서 제 가치는 상승하지 못한 것 같아 다시 취업 시장으로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