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차 직장인의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또 미국인가’에 대한 고찰
"쥐뿔도 없는 게 왜 또 미국이야" 며칠 전 어느 선배가 말했다.
그러게... 미국 생활이 그리운 것도 아쉬운 것도 아닌데.
어쩌다 또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는 것일까.
남편은 10년 다닌 회사를 때려치고 유학을 선언했다.
남들은 영어시험 점수라도 받아놓고 사표를 던지던데, 사표부터 던지고 영어공부를 시작한다 했다.
이것이 진정한 배수진인가 하며 어리둥절했던 1년 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오클라호마주로 가게 됐다.
2012년 7월, 그렇게 첫 미국 1년살이가 시작됐다.
미국 생활은 복장터짐의 연속이었다.
인터넷을 신청하니 셀프키트가 왔는데, 설치는 될 생각을 안 했다.
만일 우리 과실이면 출장비 99달러를 받겠다는 협박을 감수하며 기술자를 불렀다.
하지만 기술자도 한여름 더위 속에 2시간을 씨름하다 다음을 기약하며 떠났다.
전기요금 문제로는 이메일 쓰기 실력이 늘었고,
화장품 샘플 받으려다 구독서비스를 신청해버린 나는 전화영어에 통달하게 됐다.
두번째는 2014년 말부터. 당시 결혼 9년차에 시험관시술로 임신에 성공한 나는 기로에 서 있었다.
남편이 있는 미국 출산이냐 산후조리원이 있는 한국 출산이냐...
미국에서 한인 산후도우미를 예약해 놨었지만, 막판에 취소당한 참이었다.
결국 아이아빠를 택한 나는 육아를 글로 배우며 두번째 미국 1년살이를 시작했다.
결혼 10년차. 하지만 부모 1년차. 우리는 서툴었다.
백일된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잠시 다녀왔다. 안락한 우리집 쇼파에 앉으니 초록색 먼지가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아파트 전체가 초록색 곰팡이로 덮여있었다.
습한 여름에 에어컨을 안 틀어놓고 간 탓이라 했다. 모든 세간살이를 닦고 말리고 결국 버렸다.
토네이도 워닝이 뜨던 어느 날엔 남편이 야구팀 후배들과 파티버스를 타러 가고 없었다.
긴급 키트로 짐을 꾸리고, 쉘터행이냐 아이와 함께 욕조에서 매트리스 뒤집어쓰기냐를 놓고 고민했다.
돌아온 남편은 토네이도 워닝 소식조차 모르고 있었다. 참 행복한 인간 같으니라고.
첫 생일날 한국행 비행기를 탄 딸아이는 곧 2학년을 마친다.
지난 겨울, 남편이 말했다. “미국, 다시 가기로 했었잖아.”
그랬다. 아이를 미국에서 낳았으니, 미국의 기억도 주는 게 의무일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물론 ‘가능하면’, 이라는 전제는 있었다.
그 이야기를 몇 달은 묵히고 있던 차에, 챗gpt와 생성AI로 세상이 계속 떠들썩했다.
‘내가 하는 일은, 언젠가 AI의 몫으로 사라지겠구나...’ 불안이 엄습해왔다.
물론 당장 몇 년 내로 벌어질 일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이대로 가만있어도 될까 싶었다.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고민이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 연수를 택했다. 아이도 데려간다. 남편은 함께 가지 않는다.
회사에서 휴직을 받기까지, 집과 차를 정하기까지 여러 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저녁이면 비행기를 탄다.
이번엔 조지아주다. 3번째 미국 1년살이 개봉박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