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에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본 글에는 영화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참 이상한 경험이다. 오늘은 아내가 허락해 준, 나 홀로 야간영화를 보고 온 날이다.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영화가 참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들뜬 마음으로 영화 '파묘'를 보고 왔다. 영화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꽤 몰입하며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문제는 영화가 아니다. 나는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 단지 혼자 영화를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도대체 무슨 감정과 생각이 나를 감싸고 있길래 이런 걸까? 영화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그리고 지금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순간까지도 입 밖으로 한마디의 말도 내뱉고 싶지가 않다. 이런 기분은 아마 살면서 처음인 것 같다. 영화의 어떤 내용에 대해 깊이 생각하느라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언가 말로 뱉으면 그 의미가 온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도 있는 것 같다.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이 순간의 감정을 기록은 하고 싶어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원인은 분명 영화에 있지만 원인이 오직 영화인 것 같지는 않다.
지금 혹시라도 내가 뱉어내고 있는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내가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정확하다. 나는 횡설수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언어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언어는 절대 우리의 생각을 절대 모두 담을 수 없다. 쇼펜하우어도 비슷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가 했던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내용은 '언어로 우리의 생각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아무튼 지금 나는 횡설수설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내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언어로서 명확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개의 문장이 내 머릿속을 떠다닌다. 왜 이 영화를 본 이후에 내 머릿속에 이런 문장들을 순차적으로 떠오르는 건지 그 논리적 인과관계는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것 같다. 그저 샘솟는 듯한 이 생각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런 생각들이 2024년 3월 어느 날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내가 나를, 나의 나라를, 나의 민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누군가 그것을 사랑해 주길 기대할 수는 없다', '책임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비겁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자', '나는 생각할 때 비로소 내가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면 진정 타인의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왜 잘하고 싶은가. 자기만족이라는 위선인가, 앞서가고 싶은 욕심인가, 인정받고 싶은 나약함인가', '기억되고 싶은가, 잊히고 싶은가', '뿌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빠가 되니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
두서없는 문장의 나열을 잠시 멈추고 생각하다가 이유를 찾은 듯하다. 나는 파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했다.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지금의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비교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내가 겪은 일, 일상에서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이 영화의 내용과 맥락 없이 엉키며, '기억하고 싶거나, 부끄럽거나, 다짐하는 것'들을 문장으로 만들고 있던 것이다. 말을 뱉지 못하는 것은, 이 생각들이 참 소중해서 그것이 멈출 때까지 그 떠오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았으니 떠오르는 문장들을 좀 더 그대로 두자. 그것이 자연스레 멈추길 기다리다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내일 아침에는 명랑한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를 보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닌 등장인물의 감정에 보다 깊이 빠지게 된 것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아! 예전에 라라랜드를 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것도 같다. 하지만 파묘는 라라랜드와 비교했을 때 이야기가 주는 인상이 상당해서 내용적인 측면에 더 여운이 남을 법 한데, 내가 등장인물의 생각에 보다 집중했다는 것은 배우들이 그만큼 연기를 잘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