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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무수천

17코스(광령1리사무소←제주관덕정분식, 18.1Km) 3

by 커피소년

어영공원은 언덕이었다. 지나온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었고 나아갈 길은 민틋한 내리막이었다. 시야가 갑자기 확 넓어졌다. 멀리 있는 뿌옇고 엷은 막은 제주공항의 도심과 초록의 한라산 사이를 조용히 가르고 있었다. 왼쪽으로 제주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드림타워가, 오른쪽에는 잠시 후 오를 도두봉이 솟아있다. 내리막길은 제주 공항의 철조망과 함께했고, 마을의 안녕을 보장하고 수호해 주는 2기의 방사탑이 보였다. 내리막길의 끝에는 몰래물(‘물이 있는 곳의 모래’ 또는 ‘모래나 자갈이 있는 곳에 솟는 물’이라는 의미) 쉼터가 있고, 이곳을 추억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안내석도 있었다. 몰래물은 마을 이름이었다. 1979년 제주국제공항의 제3차 확장공사로 인해 마을이 없어져 주민들은 인근 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주한 주민들이 모여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런 쉼터와 안내석을 만들었다. 용천수를 이용한 원형의 남녀 목욕탕이 해안가에서 유물처럼 사람들의 흔적을 지키고 있었다.

<어영공원에서 본 풍경과 방사탑>
< 몰래물 쉼터 안내석과 목욕탕>

바다를 보며 걸었다. ‘범죄 없는 마을’이라고 쓰인 커다란 검은 안내석과 인어와 돌고래 상이 있는 쉼터, 그리고 위치를 알 수 없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고랭이할망하르방당’의 안내판, 노랑 바탕의 PAIK'S COFFEE 간판, 무지개색이 연이어 칠해진 경계석(무지개 해안도로)들과 그 위에 드문드문 세워진 조형물들 그리고 건물 사이에 하얗게 핀 메밀꽃 등이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정표들이었다. 간간이 돌고래 동상이 보여 이곳이 돌고래가 출몰하는 해안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만의 이정표들 / 이 구간에서는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도두봉은 정상까지 얼마 걸리지 않는 오름이었다. 정상에는 ‘도원봉수대 터’를 알리는 안내석이 놓여있다.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잠시 쉬었다. 봉수대가 있을 만한 곳이었다. 사방이 탁 트여 주변 어디나 멀리까지 잘 보였다. 멀리 지나온 길이 보였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펼쳐지는 사라봉이 봉긋이 솟아있고, 사라봉을 비끼듯 비행기가 이륙하고 있었다. 제주공항을 보니 공항 때문에 사라진 몰래물 마을이 떠올랐다. 그 마을은 서울 변두리에 있던 내 어린 시절 마을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산이 있었고, 산 밑으로 이어진 마을 앞엔 논이 펼쳐졌다. 다른 마을과 경계를 긋듯 시내로 들어가는 4차선 도로가 지나갔고, 도로 너머로 양어장이 웅크리고 있었다. 마을의 내부를 가르는 천이 흘렀고, 천 옆으로 4차선 도로를 향한 작은 도로가 동무처럼 함께했다. 집 근처에는 큰 공터가 있어 그곳에서 동네 형들과 야구를 했다. 일 년에 몇 번은 마을 가로질러 평소에 가지 않는 북쪽 동네를 가곤 했다. 우표 사는 날이었다. 우체국이 마을 북쪽에 있어 컴컴한 새벽에 생으로 먹을 라면 한 봉지를 들고 친구들과 먼 길을 떠났다. 지나는 길엔 빨래터였던 원터가 있었다. 그곳은 새벽엔 공포였다. 온도 차이로 인해 물에서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때 방영되었던 전설의 고향에서 귀신은 이런 연기와 함께 항상 등장했기 때문에 귀신이 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친구들과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잠들어 있는 집들과 초등학교 그리고 시장을 지나 4~50분을 걸어 우체국에 도착했지만 벌써 긴 줄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체국이 문 열 때까지 생라면을 먹으며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그때의 밤도 떠올랐다. 지금도 그곳에 산다. 마을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는 모습을 꾸준히 지켜봤다. 그때의 흙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밑에 숨어있고, 그때의 집들은 아파트로 거대하게 자라났다. 나의 마을은 사라지지 않고 변했을 뿐이다. 긴 산책을 할 때면 나는 종종 그때의 마을을 그려보곤 한다. 그릴 때 그 시절을 종종 그리워하지만 애달파하진 않는다. 그러나 몰래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쉼터의 안내석에 그리움과 애달픔을 새겼다. 그래도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추억과 흔적조차 사라진 추억은 정서의 무게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도두봉 입구와 정상에서 본 풍경>

도두봉을 내려가 도두항과 만난 길은 굴렁쇠 굴리기,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팽이치기, 딱지치기, 말타기 놀이 등, 옛 놀이를 형상화한 ‘도두 추억愛 거리’를 지나갔다. 이곳을 지날 때 이 형상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몰랐다. 거리 끝에 있는 거리명과 내용을 보고서야 알았다. 조형물을 사진 찍고 싶었지만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역방향으로 걷을 때 이런 불이익을 받는다. 역방향으로 걸으면 때론 뭔가 있는데 내용도 모르고 지나게 된다. 순방향이면 시작이었을 끝에 가서야 지나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보게 된다. 역방향으로 걷는 것은 마치 헤어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게 된 어리석은 연애와 같다.

<도두항>
<‘도두 추억愛 거리’>

‘도두 추억愛 거리’부터 외도 포구까지는 해안 길이다. 이 길에서 생각의 회로는 작동되지 않았다. 회로를 돌리기 위한 전기, 즉 에너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이 지쳐있다 보니 에너지를 생각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아껴야 했다. 물론 스파크가 일 듯 잠시 번쩍이는 생각들이 있었으나 지속하지 못하고 바로 사그라들었다. 모든 에너지는 17코스 완주를 위한 것에 집중되었다. 그래도 간간이 이정표 같은 표지가 나타나면 읽었다. ‘조진여물’, ‘피아노거리’, ‘이호테우 해수욕장’ 그리고 ‘알작지왓’가 그런 표지였다.

<조진여물>

‘조진여물’은 ‘도두 추억愛 거리’에서 완만하게 호를 그린 길의 끝에 있었다. 바다를 보며 걸었지만, 그동안 지금이 썰물 때인지 밀물 때인지 관심도 없었다. ‘조진여물’이라는 안내판을 보고 지금이 밀물 때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다. 바닷가 바닥이 얕거나 썰물일 때 보이는 바위나 돌들을 ‘여’라 하는데, ‘조진여물’은 이런 ‘여’가 연이어 있는 물을 말한다. 안내판에 있는 사진을 보니 해안가가 멀리까지 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해안가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바닷물이 차 있다. 밀물 때인 것이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바다가 밀려오는지 물러가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갑자기 천천히 밀려오거나 밀려나는 바다의 큰 움직임을 보고 싶었다. 해안 길을 오래 걷다 보면 볼 수 있을까?

<피아노거리와 이호테우 해변에서 본 말등대>

‘피아노거리’는 ‘조진여물’에서 꺾인 곳에 있었다. 해안가를 표현한 것 같은, 또는 그랜드피아노를 연상시키는 안내판 위에 빨간 말과 하얀 말이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다. 피아노 거리와 말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몰랐다. 나중에 보니 밤이 되면 거리의 바닥에 놓인 사각형의 등에 불이 들어오고, 밟으면 조명색이 변한다고 한다. 벌판 멀리 거대한 말 형상의 구조물이 서 있는데 그것은 이호항의 말 형상 등대였다. 말은 제주의 조랑말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곳의 벌판이 황량해서 별 감흥이 없었다.

<이호테우 해변>

‘피아노거리’를 지나면 바로‘이호테우 해수욕장’이 나온다. 이름이 너무 특이했다. 이호는 동네의 이름이었고, 테우는 제주에서 주로 사용했던 전통 방식의 뗏목 배였다. 여러 나무를 엮어 만든 단순한 구조이지만 여간한 풍랑에도 뒤집어지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테우와 관련된 축제가 펼쳐지기 때문에 해수욕장 이름도 지명과 축제 명을 혼합하여 이호테우로 한 것 같았다. 이곳도 삼양해수욕장처럼 맨발로 해변을 걷는 이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해변이 조금 검었다. 검은 해변에서는 맨발로 걷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보였다.

<내도동 ‘알작지왓’와 설문대할망>

‘이호테우 해수욕장’에서 시작된 약간 구불구불한 직선의 길은 외도 포구에 닿았다. 외도 포구에 가까워지면서 해변의 입자는 굵어졌다. 모래에서 자갈로 어느새 변해있었다. 내도동 ‘알작지왓’이었다. 안내판을 읽었다.

‘알작지왓’은 아래(알), 자갈(작지), 밭(왓)이라는 뜻으로 ‘아래쪽에 있는 자갈밭’이라는 말이다. 이곳은 바다와 땅이 만나는 곳이다. 제주도 화산암의 조각들이 오랜 세월 파도를 맞아 둥근 자갈이 되었다. 자갈은 검은색, 옅은 갈색, 옅은 회색 등 다양한 빛깔을 띠고 있다. 특히 거친 파도가 밀려올 때 이 자갈들이 파도를 따라 구르며 내는 소리로도 유명하다.


흔히 말하는 몽돌 해변이었다. 내도동의 해변이 알작지가 된 이유는 설문대할망이 오백 장군이라는 아들들의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외도동 일대 토지를 개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지 개간으로 나온 돌을 내도 바다에 모아두었기 때문에 몽돌 해변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서 제주 여성의 고단한 삶의 단면을 읽을 수 있었다. 오백 장군은 500명의 아들들을 통칭한 이름으로 이들은 어느 정도 자란 아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밭을 개간할 때 아들들과 함께해야 했다. 그러나 설문대할망 혼자 했다. 여기서 제주의 여성은 집안일뿐만 아니라 생계까지도 책임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한라산 서남쪽 기슭의 영실에 있는 수많은 기암괴석과 관련된 설화에도 설문대할망과 오백 장군의 슬픈 이야기가 내려온다)

<광령천 길과 월대>

길은 외도 포구에서 광령천을 거슬러 주삿바늘처럼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마음이 급했다. 이 길을 지도로 봤을 때 긴 마을이 없는 숲길이나 밭길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였다. 걷다 해가 지면 꼼짝없이 어둠에 갇혀 그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어제의 경험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게 하는 알레르기를 일으켰다. 걸음이 빨라졌다. 길은 물가에 비친 밝은 달그림자를 구경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월대’를 지나, 광령천을 따라가다 밀당하듯 광령천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멀어지다 창오교에서 다시 만났다. 그 사이 소나기가 한차례 쏟아졌다. 급히 우산을 폈는데 우산살 두 개가 녹이 슬었는지 부러졌다. 한쪽이 푹 꺼진 상태로 쓰고 갔다. 부러져 꺼진 쪽으로 빗물이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잠바가 방수여서 괜찮았다. 걷는 이가 없어 그런지 주위는 조용했다. 빗방울이 우산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오롯이 들을 수 있었다. 내리꽂는 장대비가 아니라 사부작사부작 내리는 비여서, 지지직 지지직 우산에 스미듯 내려 우산의 검은 원단을 타고 수줍게 방울져 떨어졌다. 계속되는 지지직 지지직 소리가 프라이팬의 전 부치는 소리를 연상시켜 급격히 배가 고팠다. 밭길이어서 주변엔 편의점도 없었다. 소나기가 그치자 걸음을 더 빨리했다.

<무수천 풍경,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을 너무 담지 못했다>

걸음은 창오교에서 잠시 멈췄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건천인 광령천의 바닥 모습에, 난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날카롭게 날이 선 거대한 돌들의 세상이었다. 돌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지만 내 느낌은 거대했다. 건천인 이곳에서 돌들이 물살이 되어 내게로 거세게 굴러오는 것 같았다. 난 압도되었다. 광령천을 따라 걸을 땐 절벽의 갈라진 바위들이 살아서 하나하나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달려들 것 같았다. 그리고 길의 다른 쪽은 넝쿨이 보이는 모든 것을 덮어 초록으로 지워버렸다. 거대한 나무도 넝쿨에 감겨 변신 중인 것 같았고, 그 변신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신화 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빛이 엷어지고 있었다. 이곳이 어둠으로 물들면, 어둠은 주변의 모든 사물에 숨을 불어넣어 살아나게 하여 나를 덮치게 할 것 같았다. 암흑에 대한 어제의 공포와 이런 생각이 날 소름 돋게 했다.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작은 간세가 보였다. 이곳이 물줄기가 복잡한 인간사의 근심을 없애준다는 무수천이라고 알려주었다. 근심을 없애준다고? 없애주긴 했다. 거대한 두려움이 인간사의 작은 근심을 싹 몰아냈으니. 그런데 광령천의 다른 이름이 무수천인가? 아니면 광령천의 일부 구간을 무수천으로 부르는 건가? 어둠이 빛을 지우자 이런 물음도 빛과 함께 사라졌다. 완전히 어두워진 광령1리사무소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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