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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바다식목일

4코스(표선→남원) 4

by 커피소년


해양수산연구원을 벗어났을 때 거대한 초록 파충류를 봤다. 그것은 검은 해안에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파충류 모습의 나무였다. 해풍이 저런 형상으로 나무를 다듬었구나. 이런 것이 '아포페니아(Apophenia)'가 아닐까? 해풍은 그냥 지나간 것이고, 나무는 해풍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누운 것뿐이다. 그것에 나는 무의적으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했다. 인간은 주변 현상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런 인간 사고의 특징을 아포페니아라고 부른다. 특히 시각적으로 모호하고 흐릿한 것에서 명백하고 뚜렷한 패턴을 찾아내려는 심리를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라고 한다. 그 예가 구름에서 어떤 동물을 연상하는 것이고 나무를 보고 파충류로 해석하고 있는 그때의 나도 있다.


<나무가 파충류처럼 보였다>


해풍에 누운 나무를 지났음에도 앞서가던 그는 정말 보이지 않았다. 해안 길이라 구불구불해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저 멀리, 바다 건너 하얀 점 같은 등대가 보였다. 해안 길을 걸으면 멀리 바다로 뻗어 나온 뭍이 보인다. 해안선의 굴곡으로 인해 내륙으로 살짝 들어갔다 바다로 도출한 부분이다. 길의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때 그런 곳을 목표 삼아 걸었다. 긴 길을 잘게 끊어 작은 성취를 만들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해안 길에서 내가 만든 소소한 재미였다. 이번엔 저 하얀 등대까지. 그 등대가 머릿속에서 그를 지웠다.

<원안에 등대가 있다>

걷다 뒤돌아보았다. 가로수 같기도 하고 양식장의 담장 같기도 한, 줄지어 선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보였다. 마치 선생님에게 매 맞기 위해 엉덩이를 내밀고 칠판을 향해 기울인 학생들 같았다. 그곳을 지날 때 나무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멀리서 보니 내가 생각한 것과 달라 보였다. 해풍이 부드러운 바람길을 내기 위해 나무들을 쓰다듬으며 저런 형상으로 만들었다. 종종 걷다 뒤돌아본다. 지나며 본 풍경이 지나와 뒤돌아본 풍경과 전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곤 깨닫는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현상이나 존재를 둘러싼 수많은 면 중에서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성급하게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아포페니아이면서 파레이돌리아인 심리를 본다.


<아포페니아이면서 파레이돌리아인 심리 : 해풍이 만든 나무의 모습>


한 남자가 러닝을 하며 다가와 지나갔다. 부러웠다. 저렇게 씽씽 달리는 게. 무릎 때문에 러닝도 제대로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라질 때까지 보다 다시 걸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길과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는 바다, 이로 인한 지루함 때문일까? 또는 하얀 등대 때문일까? 사진 같은 두 장의 이미지가 기억 속에서 검은 아스팔트 위로 툭 떨어졌다. 철문이 있었고, 눈이 내렸는지 주변은 하얬다. 오금동에 있었던 성동구치소였다. 나는 그 철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혼자였던 것 같았고 어른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것은 법정에서 하얀 겨울 수의를 입고 있던 아버지 모습이었다. 돈을 빌렸고, 갚지 않았고 그래서 사기죄로 재판을 받았다. 약식재판이었던 것 같았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치 자동화된 공장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상품들이 나오듯, 미결수가 판정을 받고 빠지면 바로 다음 미결수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집행유예를 받고 기뻐하며 법정의 문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건조한 시선으로 봤고 이때 자퇴를 결심했다. 불안했던 희미한 느낌의 현실을 이날 명확하고 시리게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가 고 2 겨울 방학이었고,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누가 알려주었고 누구와 함께 갔는지 지금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차가 쌩하고 지나갔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사진들은 허공에 잠시 떠 날리다 사라졌다.


<러닝하고 있는 사람>


걸을 때 카카오맵을 항상 켜둔다. 옳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 또는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틈틈이 보곤 한다. 맵을 보니 해안가에 ‘거믄머처’가 있었다. 포토존인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해안은 검은 현무암으로 가득했다. ‘거믄’이 ‘검은’인 것 같은데 ‘머처’는 모르겠다. 느낌상 현무함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하얀 등대가 보였다. 등대에 접근하기 전에 ‘황근복원지’라는 갈색 안내판이 길가에 보였다. 안내판 옆으로 초록 잎이 핀 황근들이 보였다. 반가웠다. 해풍에 지지 말고 씩씩하게 잘 자라렴.


<황근복원지와 너머의 거믄머처>

철로 된 물고기 형상도 보였다. 물고기가 알을 품은 것처럼 여러 개의 원이 내부에 있었다. 신기해서 읽었다. 바다숲 조성에 대한 것이었다. 갯녹음 현상으로 황폐화된 바다에 해조류를 심어 다시 생명력 넘치는 바다숲이 되살아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는 사업이라고 했다. 갯녹음? 단어만 보면 좋은 현상 같은데 아니었다. 갯녹음 현상이란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탄산칼슘(석회가루)이 여러 원인(주로 인간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다)으로 과포화되면서 바닷물에 녹지 않고 빠져나와 해저생물이나 해저의 바닥, 바위 등에 하얗게 달라붙는 현상으로 바닷속은 해조류가 사라져 사막처럼 황폐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백화현상 또는 바다의 사막화라고도 불린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바다의 나무인 해조류를 심어 숲을 만든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는 5월 10일을 바다식목일로 지정하고 있다.


<바다숲 조성 안내>


물고기 안내판 옆에 바닷가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또 있다. 해녀들이 다녔던 해녀 길이었다. ‘또똣노랑 가리마’가 작게 표기되어 있다. ‘또똣’은 ‘따뜻한’의 제주방언이고 노랑은 노란 황근과 노란 귤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가리마’는 이곳 세화 2리의 예전 지명이다. 더 예전에는 포구의 머리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 하여 ‘갯머리’라 불렸는데, ‘갯머리’가 ‘가마리’ 변한 것이었다. 해녀 길로 한 남자가 걷고 있다. 내 눈은 그 남자에서 근처 하얀 등대로 옮겨갔다. 해양수산연구원을 지나며 설정했던, 목표로 삼았던 등대였다. 도로에서 등대까지 해녀 길처럼 길이 반듯하게 잘 놓여있었다. 십여 명의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등대와 그 주변에서 포즈를 취했다.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들을 보다 등대 주변의 암석들로 눈이 갔다. 이전에 봤던 것들과 달랐다. 형상들이 매우 거칠었다. 마치 녹아내리다 갑자기 멈춰버린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근처 매오름이란 곳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만들어낸 모습이었고, 그 모습이 마치 금수강산 같아서 이곳을 ‘가르마 금수강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다 ‘머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머체’는 오름 내부의 용암인 마그마가 지하에서 굳어진 돌무더기 형태를 말하지만, 의미가 확대되어 돌이 많거나 무더기를 이룬 곳에도 쓰였다. ‘거믄머처’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머처’는 ‘머체’ 일지 모른다. 그러면‘거믄머처’는 ‘검은 돌들이 많은 곳’라는 뜻일 것이다. 해안은 울퉁불퉁 검었다.


<해녀길>
<등대와 가리마 금수강산>


포구에 가까워졌다. 연대 같은 것이 보였다. 유치원 아이들이 여러 명이 한 조가 되어 연대에 올라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주변을 살폈다. 안내판은 없었다. 알고 보니 연대가 아니라 ‘광명등’이라는 등대였다. 옛날에는 광명등을 켜는 사람을 ‘불칙’이라 불렀고 포구 가까이 사는 사람 중에서 나이 많고 고기를 못 잡는 사람이 맡았다고 한다. 쓸모를 다한 이에게 쓸모를 부여한 공동체의 지혜를 읽는다. 아담한 세화항이 보였다.


<광명등>


민속이라는 이름의 해안도로와 올레의 동행은 세화항에서 끝났다. 세화항에서 민속해안도로는 일주동로와 만나 사라지고, 올레는 뭍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더 나아갔다. 제주해양수산연구원부터 세화항까지 해안 쪽은 예전에 지나온 길과 별 차이가 없었다. 푸른 바다가 있고 검은 현무암의 해변과 초록의 풀밭이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길 반대편은 달랐다. 세화항까지 00 수산이라는 명칭의 검은 비닐지붕의 양식장들이 주를 이루었고, 벽들은 빛바래며 낡아 벗겨지고 있었다. 이야기도 없었다. 되도록 보지 않으려 했다. 간혹 볼 때면 무거운 답답함이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낡고 벗겨진 벽들>


길은 마을 길을 따라 일주동로로 가지 않고 하천으로 내려갔다. 건천이었고 현무암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멀리 보이는 방파제가 가리마개(가리마포구)로 불리는 세화항을 바다로부터 안전을 보장했다. 건천을 건너 큰길이 아닌 바다로 면한 좁은 길로 들어섰다.

<건천에서 본 세화항>

(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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