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코스(서귀포 버스터미널←제주올레여행자센터, 15.7 km) 4
나를 닮은 숲을 외면했다. 닮은 꼴을 회피하는 건 나약한 자들의 습성이다. 또 지나면 금방 잊어버린 것도 그러하다. 길은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고 그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젖고 있는 길은 넘치지 않아 물 없는 엉또폭포를 향했다. 엉또다리 입구에 비 맞고 선글라스(누가 강제로 씌운 것 같다)를 쓴 돌하르방이 나를 맞이했다. 선글라스 때문인지 TV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에 나오는 저팔계와 오버랩되었다. “비도 오는데 고생하셔” ‘~셔’로 끝나는 특유의 말투로 저팔계가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나도 “비 오는데 선글라스가 멋있으셔” 하며 지났다. 다리를 건너 악근천 변의 오른쪽으로 조금 걸으니 나무 데크가 천변의 나무들과 함께 엉또폭포로 이어졌다.
엉또폭포는 한라산 지역에 70mm 이상의 큰비가 내려야 폭포의 물줄기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지금 내리는 약소한 비의 양으론 어림없다. 폭포를 옆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데크 길 입구의 안내판이 설명한 대로 물줄기 없는 폭포는 50m 높이의 기암절벽일 뿐이었다. 그래도 이곳이 폭포라는 것을 증명하듯 폭포의 소에는 물이 가득했다. ‘엉또’, 이름이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나온 폭포의 이름-정방, 소정방, 천지연-은 한자어라 잘 구워 만들어진 빨간 벽돌 같았고, ‘엉또’는 구멍이 숭숭 나 울퉁불퉁한 집담의 검은 돌덩이 같았다. ‘엉’은 ‘작은 굴’을, ‘도’는 ‘입구’를 의미하는 제주어로, ‘엉또’는 ‘작은 굴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한다. 작은 굴? 엉또폭포 옆에는 작은 굴이 하나 있고, 예전 올레 7-1코스가 엉또폭포 바로 앞을 지날 때는 그 동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코스가 변경되어 폭포 측면에 설치된 전망대가 가장 가까운 접근이라 그 동굴을 볼 수 없었다.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에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원나라 금은보화 숨겨둔 곳’, 호기심이 인 것 어쩔 수 없었다. 금은보화가 아닌가? 내용은 제주도의 가치를 알게 된 원나라가 이곳에 피난궁을 짓기로 하면서 목수들과 자재 그리고 금백(황금과 비단), 황실 창고의 귀중품을 제주도로 이송했고, 금은보화를 이곳 엉또폭포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고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다. 보물 이야기는 항상 전설로 시작된다. 그리고 전설이 눈먼 욕망과 엉키면 전설은 사실이 되고 탐사를 위해 사람들은 배를 띄운다. 누군가는 한 번쯤 혹해서 이곳을 탐사했을지도 모른다. 검색해보니 엉또폭포에 숨겨진 보물과 관련된 탐사는 아직 없었던 것 같았다. 엉또폭포의 출구 같은 무인카페 안에 있는 긴 모니터 화면으로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리는 폭포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았다. 너무나 극과 극인 폭포의 모습이다. 카페의 전망대로 가서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풍경은 연기처럼 흐르는 회색의 하늘과 땅에 뿌리를 박고 솟아오른 초록 숲의 대비는 비정형과 정형의, 무채색과 유채색의 대비였다. 비는 대비를 짙게 하면서도 경계를 넘고 있었다.
엉또폭포를 나온 길은 띄엄띄엄 감귤농장이 있고, 그 사이사이를 가로수들이 채운 길이었다. 비는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길가로 빗물이 흘러내려갔다. 비 오는 날이면 학장 시절의 두 장면이 항상 떠오른다. 시간이 하도 흘러서 장면의 시작과 끝은 누렇게 바래고 바래서 바스러져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비 맞은 순간만큼은 영화처럼 저장되어 있다. 두 장면 모두 고2 때였다. 하나는 여름 방학 전이었던 것 같다. 토요일 4교시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남아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그리고 도중에 비가 왔다.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에 젖고 있는 상의가 거추장스러운지 벗고 뛰었다. 물론 모든 것이 젖은 상태로 집에 가면 당연히 엄마에게 혼나겠지만 그때 우린 그런 뒷일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비에 뭔가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상쾌했다. 운동장이 흙탕물이어도 골을 넣으면 좋아했고 골을 먹으면 절망했다. 그때의 우린 아주 단순한 생물이었다. 다른 한 장면은 계절은 모르겠지만 그때도 토요일이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안국동에서 혜화동으로 걷고 있었다. 어쭙잖은 철학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창경궁과 종묘 사잇길을 지나갈 때 갑자기 비가 왔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친구들을 다시 봤다. 친구들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비가 대수냐는 듯 무시하고 다시 걸었다. 혜화동 근방에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모두 수건으로 머리만 털곤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대학로로 나갔다. 두 장면이 시간의 압력을 견디며 기억에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장면에는 비가 핑계가 되어 행위를 멈춘 것이 아니라 비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해버린 무모함, 그리고 그 무모함을 용인한 손익계산 없던 무리의 들뜬 열기가 있었다. 지금은 그 무모함과 계산 없는 무리의 열기를 절대 느낄 수 없다. 그래서 이 장면들은 나에겐 노스탤지어다. 노스탤지어이기에 그것들은 끝끝내 살아남아 몇 없던 내 청춘의 행복을 증언해야 했다. 거듭된 증언을 위해 장면은 무의식적으로 비와 연결된 것일도 모른다. 홀로 비 맞고 걷는 지금, 그때의 무모함은 있어도 계산 없던 무리의 비정상적인 들뜬 열기는 없다. 쉰내를 풍기게 하는 체온도 열기라 말할 수 있을지.
감귤체험을 하는 ‘엉또달다 카페&농원’과 감귤 같은 불빛의 'gamttanam(감따남) 테마카페' 그리고 엉또폭포를 지나온 건천인 악근천을 지나니 중산간서로라는 대로로 나왔다. 길은 강창학 공원을 거쳐 서귀포 시가지로 들어갔다.
강창학 공원은 무척 넓었다. 축구장과 야구장이 있는 체육공원, 기후대응 도시숲, 도시바람길숲으로 나뉘었고, 올레길은 도시숲과 바람길숲을 지나갔다. 위성사진을 보면 정말 넓었다. 이 넓은 부지를 강창학이라는 사업가가 기부했고, 그를 기리기 위해 공원의 명칭에 그의 이름을 넣었다. 그가 2003년 1월 9일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서귀포시는 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르려 하였으나 그의 생전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소박하게 치렀고, 화장하여 묘지도 따로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진정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이었다.
신시가지를 지날 때 거의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몇몇 식당을 보니 배가 맹렬하게 고파왔다. 참고 종점(원래는 시작점) 근처에 있는 이마트 푸드코너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우선 7-1코스를 빨리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서귀포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고 바로 이마트로 갔다. 어제 7코스를 이곳에서 끝내며 7-1코스 스탬프도 같이 찍었다. 비는 잦아들고 있었으나 아직 오고 있어서 스탬프를 찍으려 했으면 많이 번거로웠을 것이다. 이마트에 들어가 푸드코트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원래 없다고 한다. 힘이 갑자기 쭉 빠졌다. 나가 터미널에도 가보니 없었다. 건너편에 맥도널드가 보였다. 따뜻한 국물이 있은 것을 먹고 싶었지만 어딜 갈 기력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결국 햄버거와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맥도널드 화장실에 가서 몰골을 봤다. 당연히 엉망이었다. 맥도널드에 들어설 때 방금 물속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모자의 챙에서 빗물이 떨어졌다. 화장실에서 대충 몰골을 정리했다. 바람막이 재킷을 벗으니 쉰내가 났다. 통풍이 안 되니 배출 안 된 땀이 속옷에 배고 체온에 절어 냄새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시 재킷을 입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비를 피하고 있으니 젖은 신발과 양말의 축축함이 발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비로소 느껴졌다. 발바닥과 발가락은 쭈글쭈글해져 있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걸을 때는 이렇게 느끼지 못했다. 벗어나니 보이고 느껴졌다.
끈적임과 쉰내 그리고 축축함의 감각을 차단하고 햄버거와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8코스는 길었다. 게다가 이렇게 비가 계속 오면 포기하고 8코스 종점에 예약한 숙소로 가서, 쉬었다가 내일 걸어 올라오는 것도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먹는 사이에 신기하게도 비가 그쳤다. 걸으라는 신의 뜻인가? 잠시 고민하다가 걷기로 했다. 걷다 어두워지면 그곳에서 멈추고 택시로 숙소에 가기로 했다. 그러나 결정은 이렇게 했어도 걷는다면 코스를 어떻게든 끝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이었다.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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