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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Feb 08. 2024

내가 "작품 해설"을 보지 않는 이유

그리고 "작품 해설" 보고 떠드는 사람들이 싫은 이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소설을 다 읽은 후 부록으로 붙어있는 ‘작품 해설’을 보지 않게 되었다. 해설은 분명 작품 이해에 도움을 준다. 작가의 연보를 나열하고 작품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도식을 그려주면 독자로서는 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건 겉핥기식의 노력이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를 번역한 외대 교수가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뒤에 부록의 형식으로 작품 해설을 적었다고 해보자. 그 교수는 평생을 1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문학에 바친 사람이다. 관련서적도 엄청 읽고 논문도 몇 백, 몇 천 장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뒤편에 딸려 나오는 해설은 고작 길어야 서른 페이지 정도다. 그가 지난한 노력으로 습득한 lost generation들의 예술관을 우리가 작품 해설만 읽는다고 이해했다 말할 수 있을까?

작품해설에는 여러 분야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극히도 싫어한 성격의 것은 도식화였다.  

도식을 그려 예술가를 재단하는 것은 평론가의 입맛에 맛게, 그리고 그들 수준에서의 이해에 맞게 심판하고 계획화한 도시처럼 분류하는 것이지, 나에게는 개인만이 보이고 낭만주의라든가, 사실주의라든가,  인상주의라든가,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든가의 문제는 뒷전이었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는 러시아 사실주의 작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사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거대한 인간 서사 속에서 사랑이 얼마나 깊고 숭고하게 그려져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장대한 인간 드라마 안에서 희로애락, 그리고 그 네 가지 감정만으로는 형언할 수 없는 심오하고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내리 닥치는 것이다. 

그러나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실주의라고 하면 나는 “이삭 줍는 여인” 같은 사실주의 화풍만 보인다. 농부 혹은 빈농의 생활을 그린 그림들. 또는 초기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의 그림들이 떠오른다. 꽤나 좋은 작품들이다. 허나 그러한 사실주의로 받은 인상들이 전 예술 장르에, 그리고 위의 예시의 경우 문학 작품에까지 연결되어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아직도 스무 살이 갓 지났을 때 "전쟁과 평화"라는 대서사시를 읽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 손에서 활활 타오르는 책이 있다던데 나의 경우 "전쟁과 평화"가 그러했다. 그리고 "부활"에서 유배지로 가는, 자신이 임신시킨 여자를 따라가는 남자의 내면 서사라든가 "안나 카레리나"에서 묘사되는 여자와 남자 사이의 애증의 감정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따라가면 낭만 감수성, 매혹성, 타락으로의 욕망에 빠지기 마련이다. 

톨스토이는 지독한 모랄리스트였다. 그는 농민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한평생 기독교인으로서 회개하며 살았다. 러시아 모국을, 특히 그의 모국의 빈농들의 삶을 개선하려고 노력해 왔고 자기 개인으로서는 이십 대 시절의 도박과 술과 담배를 통한 방탕한 삶에서의 반성을 위해 서른이 지나서는 금욕 생활을 철저히 지켰다. 

그렇다고 그가 딱딱한 지표의 소설만을 쓴 게 아니다. 그는 인간 감정, 숙명, 내면의 불안과 갈등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표현한 나머지 독자의 마음을 좋든 싫든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그런 효과를 두고 그를 딱딱한 모랄리스트이자 사실주의 작가라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그는 교과서적인 교훈을 짤막하게 내뱉는 학교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는 행동과 경험, 타락과 방랑의 시절을 겪고 자신이 몸소 체험한 바를 순수하게 고백했을 뿐이다. 

성급한 결론인 것을 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사조로서 구별되고 이해되고 도식화되지 않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이나 성질이 있으며 그런 것들의 자연스러운 통합과 조화가 작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사람만 봐도 그렇다. 바넘이론이라는 게 있듯이 그는 i이면서 e 같고 t이면서 f 같다. 인간을 16 범주로 나누는 건 글쎄다, 심리학자들에게는 유의미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복잡한 인간상을 다 말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하물며 인간성을 다 게워버린 것의 집합체인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는 얼마나 많은 변덕과 변화와 갱생과 전락이 있을까. 

사조의 도식화는 나로서는 글쎄다, 떠들어대는 평론가나 소위 말하는 인텔리겐치아, 혹은 예술 좀 안다 나대는 꼴불견인 그 뭐더라, 아 그래!, 딜레탕트들의 자랑과 예술을 직접 만들지 못하는 열등감에서 오는 발악으로밖에 안 보인다. 

예술은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뭐가 더 필요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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