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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Jan 07. 2024

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새해를 맞이하여 브런치를 시작해 본다. 솔직히 마음이 동하여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반강제적으로 해야 할 사정이 생겼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타이핑을 시작한다.

인생에서 책이 가장 많이 읽히는 시기가 있다. 나의 경우 10대 후반이었다. 소설은 양식이었다. 그것 없이는 정신적으로 아사할 것만 같았다.

한편 소년 시절에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이 소설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아쉽지도 안타깝지도 않다. 별 감흥이 없다. 늙어버린 나는 소년이 아닐뿐더러 소설을 탐닉하던 시절도 지나와버렸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소년의 전유물인 까닭은 그 소설이 자아과잉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내면에 침잠하여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서 시작하여 이내 자아를 팽창시키고 끝내 외부 세계에까지 흘러넘치게 한다. 그는 구도자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아가 사그라든다. 슬픈 일이기도 기쁜 일이기도 하다. 슬픈 까닭은 나를 잃어가기 때문이고 기쁜 까닭은 치기 어린 감상벽에서 벗어나 세계의 질서에 동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나는 구도자의 태도를 오래전에 버렸다. 아니, 버렸다기보다는 저절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 실망과 절망과 좌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저 지나갔다. 

자아를 탐구하기를 그친 까닭은 내 속에 위대하다고 할만한 것이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라는 것도 애초에 신념 혹은 믿음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신념 혹은 믿음은 아집과 고집을 그럴싸하게 말한 것에 불과했다. 

책을 읽으면서 동화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슬픔을 느꼈다. 나는 베르테르였고 싱클레어였으며 토니오 크뢰거이자 히스클리프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반항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자아가 풍부하고 감수성이 뛰어나며 소망을 믿는 사람만이 반항할 수 있다. 나를 바람과 물에 씻겨 흘려버린 나는 늙어버린 혁명가에 불과하다. 

늙어버린 혁명가는 실패한 과거사를 씁쓸히 반추하며 소년을 부럽게 바라본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는 내 태도가 그랬다. 

1장은 가정사로 시작한다. 스티븐의 아버지는 한 아일랜드 독립투사를 지지하고 친척 아주머니는 그 독립투사를 반가톨릭적 인물이라고 힐난한다. 두 사람의 입장과 논쟁은 소설 전반에 걸쳐 변주된다. 그것들은 스티븐이 젊은 예술가로서 헤치고 나와야 할 거미줄이다. 

2장에서 소년기의 스티븐은 여자에게 처음으로 욕정을 품어보고 이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학교에 반항한다. 

3장에서는 성 프란시스 추념 피정이 이어진다. 돌아온 탕아처럼 스티븐은 종교에 귀의하려고 스스로와 분투한다. 

4장에서 스티븐은 학교에서 신부가 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회의감에 젖어 이렇게 반응한다.

'교회의 도도한 특권이라든가 사제 직이 누리는 신비와 권세를 택하라고 그에게 촉구하는 교장의 목소리가 부질없이 그의 뇌리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은 그 목소리를 경청하거나 환영하려 하지 않았고, 그가 들었던 권면의 말씀이 벌써 하나의 부질없는 형식적 이야기로 전락해 버렸음을  알았다. 그가 신부가 되어 감실 앞에서 향로를 흔드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의 운명은 사회적 종교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었다. 교장의 호소가 현명하다 해도 그의 급소를 찌르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들을 떠나 자신의 지혜를 배우거나 아니면 세상의 함정들 사이를 스스로 헤매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 세상의 함정이란 죄를 짓는 길이었다. 그 함정에 빠져보리라. 아직은 빠지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말없이 빠지리라.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그는 닥쳐올 어느 순간에 자기 영혼이 겪게 될 말없는 타락을 감지하고 있었다. 영혼은 점점 그 함정으로 빠지고 있으나 아직은 빠지지 않았고, 아직 빠지지 않았으나 막 빠지려 하고 있었다.'

또한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이름을 변형하여 친구들이 그를 부르는 스테파네포로스(그리스 신화에서 아들 이카루스에게 밀랍 날개를 달아주고 하늘을 날게 했던 다이달로스)라는 별명을 듣자 그의 내면에서 예술혼이 대담하게 불타오른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한다.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그 옛날의 위대한 명장처럼, 그도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5장은 마지막 장으로 대학 시절을 다룬다. 대학은 아일랜드의 영국에 대한 독립 투쟁으로 시끄럽다. 학생들은 스티븐에게 각자의 정치성을 권유한다. 그러나 정치는 그것의 목적에 상관없이 수단 그 자체로서 예술가를 옭아매는 거미줄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네 언어를 버리고 다른 나라의 언어를 택했어. 그들은 소수의 외국인들이 자기네를 예속하는 것을 허용했던 거야. 그들이 진 빚을 내가 내 삶과 몸을 바쳐 갚을 것 같으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겠니?'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 씌어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너, 아일랜드가 무엇 같은지 아니? 아일랜드는 제 새끼를 잡아먹는 늙은 암퇘지라고.'

스티븐은 냉혹하고 난폭한 어조로 국가와 사회, 정치와 도덕, 그리고 역사에 반항한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다. 현재 한국문학은 사회성에 경도되어 있다. 문학을 개인 내면을 탐구한 문학과 사회 참여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면 잘 팔리는 한국문학은 거지반 후자이다. 둘 중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한국문학이 사회 참여 문학으로 번성하는 현상이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프로파간다를 경계해야 한다. 의도성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선전물이다. 그리고 한국문학이라 불리는 작품 중에서 선전물은 있다. 

예술은 창작하는 자조차도 결과물이 어찌 될지 알지 모르는 채 하는 행위에 의의가 있다. 결과물이 아니라 창작 행위, 다시 말해 탐구 행위가 예술을 다른 학문과 문화와 구별시켜 주는 분수령이다. 하고 싶은 정치적 발언이 있는가? 좋다, 그러면 정치 철학서를 써라. 그 편이 훨씬 논리를 펼치기 적합할 것이고 논리가 이야기보다 대중을 설득시키는 데 정직하고 윤리적인 방편일 것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탐구 행위다. 창작에는 정답을 폭력적으로 강요하거나 대중을 분란시키고 양은냄비 근성에 불을 붙이는 악의적인 의도가 들어서서는 안 된다. 예술은 풀리지 않을 질문을 온화하게 제시하는 데 그쳐야 한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 디덜러스가 열변하는 예술관으로 내 첫 글을 마치고 싶다.

'비극적 정서는 정적이라는 뜻이야. 아니, 극적 정서가 정적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군. 부적절한 예술이 자극하는 감정은 욕망이냐 혐오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동적이거든. 욕망은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소유하거나 찾아가게 하는가 하면, 혐오는 우리를 충동하여 무엇을 버리거나 떠나가게 하니까. 그러므로 이 욕망이나 혐오를 자극하는 예술은, 그것이 외설적이냐 교훈적이냐를 막론하고, 모두 부적절한 예술이지. 그러므로 일반적인 술어로 말해 미적 정서는 정적이라고. 마음은 붙잡혀서 욕망이나 혐오를 초월하도록 고양되니까.'
'부적절한 심미적 수단에 의해 유발되는 욕망과 혐오는 사실 비심미적 정서야. 그 이유는 그 정서가 성질상  동적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경지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
'이러한 것들을 논하고 그 성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난 후에는 이 조잡한 대지와 그것이 제공하는 것으로부터 또 우리 영혼의 옥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음향, 형상 및 색깔로부터, 우리가 이해하게 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천천히, 겸허하게, 꾸준히 표현하고 다시 짜내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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