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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Jan 07. 2024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이번 소설은 어렵다. 첫 번째로 리뷰한 책보다 훨씬 어렵다. 내용도 단선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  실로 복합적 주제들을 다루고 그 주제들 또한 선형적으로 이분법 도식을 따르지 않고 교차되고 겹쳐진다. 이를테면 평행선으로 쭉 뻗어나가다가도 어느 순간 한 점으로 수렴하기도 하는 것이다. – 구성 자체도 어지럽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회상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에 파편적인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제멋대로 여기저기 산포 되어있다. 절대 활극 위주의 소설이 아니다. ‘행동’의 강조점이 소설 뒷부분에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을 서술하는 방식은 지성, 사념의 힘을 통해서이다. 

사실 방금 마지막 장을 읽고 덮은 터라 머릿속이 조금은 혼란스럽지만 나의 브런치 운영 철칙은 부담 없이 감각적, 직관적 감상을 스케치하는 것이기에 바로 적어보려 한다. 감상은 내부적으로, 즉 소설 외적인 정보는 배제한 채, 소설의 정신성 위주로 전개하는 것이 고전적인 방식이라 생각하기에, 소설이 어려운 만큼 내용을 두루 살피며 감상을 적어보아야겠다.

소년 시절의 미조구치는 금각의 첫인상에 빠진다. 첫눈에 반한 것이다. 그는 말더듬이다. 그는 미에 유독 민감한 데 이것은 바깥세상과의 부조화, 단절에서 오는 콤플렉스로 인한 열등감의 발현이다. 사람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병적으로 집착하고 바라기 마련이다. 미는 그 성격이 어떠하건 간에 우선 세계, 즉 나의 바깥에 있고 추남이자 말더듬이인 ‘나’는 세상에 연결되지 못한다. 고로 미 또한 나와 동떨어져 있다. 나는 세계에, 더 슬프게는 미에 차인 것이다. 내쫓긴 소년은 내면으로 침잠한다. 그곳이 그의 유일한 집이자 도피처였다. 그곳은 음의 영역이었고 축축하고 어두웠다. 

소년의 금각에 대한 사랑은 우이코라는 소녀에 대한 사랑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금각과 우이코, 이 둘은 사실상 영원성의 상징이다. 소년은 우이코에게마저 냉정하게 차이고 다시 한번 자신의 추함과 세상의 아름다움 사이의 대립과 불균형의 무게를 느낀다. 그것은 소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종류의 상실감이자 실망이었다. 그는 마음의 병을 얻으며 음침하게 내면으로 침잠한다. 

우이코는 탈영병을 숨겨주다 헌병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소년은 우이코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는 데에서 자신이 우이코라는 존재에게 감히 다가갈 수도 없는 미천한 존재임을 뼈저리게 자각한다. 그에 더하여 죽은 우이코를 신성화한다. 죽음은 우이코를 영원한 미의 여신, 고정불변한 피안의 상징으로 만들어주었다.

소년은 금각사의 승려로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토 공습의 가능성이 스멀스멀 다가온다. 소년은 전쟁과 금각을 결부시킨다. 결부된 두 이미지는 비극적 미의 관념으로 재탄생한다. 금각에 대한 경탄은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기도 하였지만 양각이 새겨지는 동시 음각도 부각되듯이 금각의 아름다움에 대비되는 자신의 추함에 소년은 남모르게 좌절한다. 그리하여 은연중에, 자신은 의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금각의 소멸을, 즉 파멸적 미를 꿈꾼다. 왜냐하면 파멸적 미에서는 자신도 금각의 경지에 똑같이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재앙, 똑같은 불의 불길한 운명 아래에서 금각과 그가 사는 세계는 동일한 차원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 교토는 초토화되지 않은 도시 중 하나로 결말난다. 금각은 초연한 고고함을 전보다 더욱 드러내며 소년에게 이러한 오만한 발언을 한다. 

“‘우리들’의 관계란 없다.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

소년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패전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결코 해방이 아니었다. 불변의 것, 영원한 것, 일상 속에 숨어들어 있는 불교적인 시간의 부활을 의미했다.”

불교적인 시간이란 피안의 연장이다. 그것은 영원이고 전체였다. 그것은 결코 필멸자로서는 다가설 수 없는 종류의 존재 양식, 미적 양식이었다. 

소년은 성장하여 대학 시절을 시작한다. 이때 친구 – 가시와기 - 를 사귀는 데 그 친구 또한 신체적 콤플렉스를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유한성, 필멸성, 순간성, 일회성을 수용하고 그것에서부터 기지를 발휘해서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가시와기는 욕정적이다. 여자를 후린 일을 무용담으로 펼쳐 놓는 인물이다. 

미조구치는 가시와기의 조언을 따라서 여자 경험을 해본다. 그러나 금각의 미가 항상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나체의 여자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는다. 금각의 영원성은 여자를 살덩이로 환원하고 살덩이는 미조구치에게 순간의 덧없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허무한 것에 끓였던 욕정이 부질없이 느껴지고 그런 에피소드들이 반복하다 보니 전체적 삶에 대학 욕구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남김없이 미에 감싸이면서 어떻게 인생에 손을 뻗칠 수 있겠는가? 미의 입장에서도 나의 단념을 요구할 권리가 있으리라”

미에 대한 도취, 미를 향한 열망, 미와 합일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충동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다. 미에 대한 정신적 갈망은 삶을 초라한 것으로 만든다. 인간은 보잘것없는 자신을 보고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미와 인생은 대척점에 있다.

“영원으로 변신한 순간은 우리들을 도취시키지만, 그것은 이때의 금각처럼 순간으로 변신한 영원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금각은 잘 알고 있었다. 미의 영원한 존재가 진정 우리들의 인생을 가로막고 삶을 해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삶이 우리들에게 잠시 보여주는 순간적인 미는 이러한 독소 앞에서는 맥도 못 춘다.”

‘순간으로 변신한 영원’에 비했을 때 너무도 유약한 ‘영원으로 변신한 순간’….

그렇다면 보잘것없는 삶의 가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미조구치는 일단 금각으로부터 도피를 실천한다. “금각은 그 자체로는 무력하지 않지만 모든 무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그 외의 모든 세상을 무색하게 만든다. 

미조구치는 우라니혼의 바다에 다다른다. 

“우라니혼의 바다였다! 나의 모든 불행과 어두운 사상의 원천, 나의 모든 추악함과 힘의 원천이었다. 바다는 거칠었다.”

바다는 그러니까 전쟁과도 같은, 모든 것을 평등한 미적 상태로 되돌리는 태고의 파괴력이었다. 그는 전쟁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을 다시는 경험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자신이 전쟁 그 자체가 되기로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

미조구치는 파멸을 추구하지만 사실 ‘살아보기’ 위해서 미를 타파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다시는 자신의 추함과 말 더듬이로 수치를 느끼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금각이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계급도에 전복을 꾀하는 것이다. 그는 삶에서의 허무를 수용하는 가시와기처럼 비겁자이자 교양인이 아니다. 완전한 삶만이 존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것을 최상의 가치이자 유일한 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자리를 기존에 차지한 미를 살인한다. 그는 무자비한 행동자로 거듭난다. 

남전참묘의 이야기가 소설에서 거듭 등장한다. 그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산속 절간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서로 다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전 스님은 당장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전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남전 스님은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우려는 의도와 같은 맥락에서 고양이의 숨통을 끊은 것이다. 즉, 남전 스님이 양당 승려들에게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라고 말하는 대목은 감당하지 못할 미를 끌어 앉고도 그에 대척되는 삶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승려들은 미와 더불어 ‘살아갈 방도’를 몰랐다. 남전 스님은 그래서 비인간적인 미의 목을 베어버렸던 것이다.

결단력 있는 행위자인 남전 스님은 곧 금각에서의 미조구치이다. 그는 미의 허무를 받아들이라는, 즉 미를 인간적으로 환원시켜 인간 인식적 차원에서만 즐기고 말면 그만이라는 가시와기의 말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는….. 미적인 건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그는 방화 실행 당일 밤에, 어둠에 잠긴 금각을 보며 유년기 시절의 감탄에서부터 이어진 순순한 미적 찬미에 다시 한번 흔들린다. 놓아주지 못하지만 헤어지려는 연인처럼.

“미가 마지막 기회에 다시금 그 힘을 발휘하여, 이전에 몇 번이고 나를 엄습했던 무력감으로 나를 속박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순간 ‘임제록’의 유명한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투탈자재해지리라.”

더 이상 부러워할 것 없이 삶에만 집중할 수 있기 위한 전제 조건인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의 경지란, 욕망의 대상을 철저히 파괴시킴으로써 완성된다. 그는 충실한 생명력의 행위자로서 계획을 수행한다. 성냥불을 금각에 던지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대미는 쓸쓸한데 이것이 마치 한편으로는 인간다움의 승리, 생명력의 회복으로 보이기도 하는 반면, 또 한 편으로는 미를 살인한 범죄, 미의 영원한 상실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방화를 마친 후, 산 꼭대기로 도피한 미조구치는 저 멀리 금각에서 연기가 불길하게 또 시원섭섭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다른 호주머니의 담배가 손에 닿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일을 하난 끝내고 담배를 한 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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