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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Jan 09. 2024

고도를 기다리며 1

사뮈엘 베케트

제1막 초반부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심심풀이로 구세주의 십자 처형에 대해 이야기한다. 

블라디미르 : 구세주하고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두 도둑놈 얘기였지. 그중 한 놈은 구원을 받았는데 또 한 놈은 저주를 받았지.

그런데 블라디미르는 여기에서 특이점을 발견한다.

블라디미르 : 도대체 어떻게 됐길래 복음서를 쓴 네 사람 중 단 하나만이 그때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전하게 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네 사람이 다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놈 얘기를 써 놓았거든. 나무지 셋 중에서 둘은 숫제 언급도 없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두 도둑놈이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은 묻는다.

에스트라공 : 누구한테 욕설을 퍼부었다는 거야?
블라디미르 : 구세주에게.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자기네를 구해 주려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두 놈이 다 저주를 받았을 거거든. 그런데 복음서를 쓴 친구 중 하나만은 그자들 중의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는 거야.

다음에 등장하는 블라디미르의 심오한 물음은 전인류의 자기기만행위를 고발한다. 

블라디미르 :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 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얼핏 보면, 그저 가벼운 대화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는 극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숨겨져 있다. 

복음서는 예수라는 인간의 생애를 기반으로 삼고 그 위에 윤리적 정언 명령이 신비주의적 서술 방식을 차용하여 덧붙여진 것이다. 즉, 복음서는 역사성을 도덕적 당위성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신화적 정합성을 서술 방식으로 취사선택하여 이루어졌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태어났다 죽는 인간에 불과했던 예수 삶의 일회성을 정합성을 띈 이데아 논리로 치밀하고 교묘하게 변형시켜 신적 가치를 고정시킨 영원성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음서는 인간이었다가 신으로 고양된 예수를 전면에 등장시켜 성부와 성자의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 완전성과 부조리의 관계를 드러낸 복잡한 서사시이다. 

다시 블라디미르의 심오한 물음으로 돌아가보자. 사람들은 두 명의 도둑이 예수를 욕하여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내용의 복음서는 거부하고 한 명의 도둑이 처형의 순간에 회개하여 예수에 의해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는 아름다운 서사시만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기억하고 그것을 단일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자신의 부조리를 신에 의한 구원 없이는 극복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자신의 삶의 유한성에서 겪는 부조리를 신을 향한 구원의 요청 없이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우리의 욕망과 요구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실상은 녹록지 않다. 피조물이 요청하면 창조주는 거부하고, 인간이 기도하면 신은 침묵하고, 우리가 혹여나 잘못된 행위를 실수로라도 한다면 아버지는 징벌한다. 유한자와 무한자의 근본적 차이점이 화해에서의 대립과 결렬을 초래하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제와 스토리도 위와 같다. 고도는 신이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인간 유한자로서 겪는 고질적인 부조리의 병을 치유할 유일한 초월적 존재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길 위에서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리며 그의 구원을 기원한다. 그러나 신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의한 불화로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이 항상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습관적 일상성에 매몰되어 산다. 일상에서 우리의 존재는 어떤 본능적 삶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가 본래적 현존재를 회복하는 때는 삶에서의 습관적 일상성이 무너질 때, 다시 말해 부조리가 엄습해 왔을 때이다. 우리는 고난의 순간에 자신의 유한자로서의 무력감과 비참함을 통탄히 절감하며 신에게 손을 뻗친다. 

에스트라공도 그렇다. 그는 길 위에서 고도를 기다리다가도 이렇게 말한다.

에스트라공 :멋진 경치로군. (블라디미르를 돌아보며) 자,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어.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사이) 여기가 확실하냐?

에스트라공은 극 전반에 걸쳐 이렇게 계속 기다림의 목적성을 망각한다. 다행히 블라디미르가 그럴 때마다 상기시켜 주곤 한다. 둘의 대화는 엉뚱한 면이 있다. 이렇게 삶의 습관적 일상성은 우리를 우스꽝스러운 동물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신을 향한 반항이라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시켜 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일상감에 방심하여 느슨하게 놓아버리는 것이다. 구원에의 열망이라는 인간 본래적 욕망은 비본래적 일상적 존재에 의해 은폐된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성을 상기시킨다고 고도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하는 무한자, 창조주, 아버지를 향한 반항의 팽팽한 활시위 같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투지를 다진다. 

에스트라공 : 만일 안 온다면?
블라디미르 : 내일 다시 와야지.
에스트라공 : 그자가 올 때까지.
블라디미르 : 너 지독한 놈이로구나.

고도를 매일 기다리지만 고도를 기다렸다는 사실마저 상시 잊는 부분은 극을 걸쳐서 계속 반복, 변주되는 테마이다. 

에스트라공 : 우린 어제도 왔잖아.
블라디미르 : 무슨 소리야? 또 헷갈리는구나.
에스트라공 : 그럼 어제 우리가 뭘 했다는 거야? 내 생각으로는 우린 분명 여기 왔었다.
블라디미르 : (주위를 둘러보며) 이 자리가 눈에 익은 모양이지?

작가는 부조리에 의해 고통받지만 그 고통에 익숙해진 나머지 부조리를 부조리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풍자하는 것 같다. 분노해야 하지만, 살다 보니까, 분노할 만한 일인가, 그냥 또 살아지는 것이다.

고도의 부재에 지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기도 한다. 신과 인간 사이에 팽팽한 무언의 대립을 포기하려는 것이다. 투쟁의 변증법에서 한 항을 포기하여 무의미한 또 이유 없는 싸움을 종말 시키려고. 그러나 그러한 고민의 장면은 무겁게 서술되지 않고 허망할 정도로 가볍게 서술된다.

블라디미를 : 이젠 어떡하지?
에스트라공 : 기다리는 거지.
블라디미를 : 그야 그렇지만 기다리는 동안 뭘 하느냐고?
에스트라공 : 목이나 매고 말까?
블라디미르 : 네가 먼저 해봐.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네가 나보다는 가벼우니까.

자살이라는 심각한 결단 앞에서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죽음마저도 가차 없이 우스꽝스러운 일로 전락시킨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부탁을 하는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이 행하는 구원은 신의 영역 아닌가? 불완전한 인식을 가진 인간이 불완전한 개념으로서 정녕 구원을 이해할 수 있는가? 

신과의 대면에서 한 겹의 베일을 눈꺼풀에 씌운 인간은 스스로가 기도자 혹은 탄원자의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그 자각에서 인간은 무력감을 느낀다.

에스트라공 : 그런데 우리가 그자한테 정확히 무슨 부탁을 했지?
블라디미를 : 저 - 딱히 뚜렷한 건 없었지.
에스트라공 : 일종의 기도였지.
블라디미르 : 맞아.
에스트라공 : 막연한 탄원이었고.

탄원자의 역할에 인간은 그친다. 사실, 신은 인간에게 빚진 게 없다. 우리는 바라는, 부탁하는, 구걸하는 입장이다. 신이 우리를 창조했다는 사실이 그가 우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와 당위와 윤리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는 신에게 구원을 강요할 권리 따위 없다는 것이다.

에스트라공 그 일에서 우리의 역할은 뭐냔 말이다.
블라디미를 : 우리의 역할이라? 그야 탄원자의 역할이지.
에스타라공 : 그 정도야?
블라디미르 : 아니면? 나리께서는 내세울 만한 특권이라도 가지고 계신지요?
에스트라공 : 그럼 우리에겐 아무 권리도 없게 됐단 말이냐? 
블라디미르 : 네 그런 소릴 들으니 웃을 수만 있다면 한바탕 웃고 싶구나
에스트라공 우린 권리를 잃은 거냐?
블라디미르 (명료하게) 헐값으로 팔아버렸지.

빈번히 가차 없이 거부당해도 우리는 존재적으로 신에게 구속된, 아니 헐값으로 인간 자주성을 팔아버려 신에게 굴복한 존재이다.

에스트라공 : (힘없이)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닐까?
블라디미르 : 고도에게?
에스트라공 : 이런! (먹다 남은 당근 청의 한끝을 손에 들고 눈앞에서 돌려본다.) 이상한데, 먹을수록 맛이 없어진단 말이지.
블라디미르 : 기본 문제지.
에스트라공 : 성격 문제다.
블라디므로 :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에스트라공 : 날뛰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블라디미르 : 타고난 대로니까
에스트라공 : 꿈틀거린다고 별수 있니?
블라디미르 : 근본이야 달라지지 않는 거지.
에스트라공 : 별수 없는 거야.

신이 인간에 있어서 거머쥔 구속성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신에 대한 필패성이다. 그 근본은 인간 고질적인 기본 문제이고 날뛰고 꿈틀거려보았자 그 근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당근 끝은 항상 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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