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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Jan 14. 2024

고도를 기다리며 2

사뮈엘 베케트

극 중반부로 가면 포조와 럭키가 나온다. 포조와 럭키의 등장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포조가 럭키의 목에 맨 끈으로 럭키를 몰고 들어온다. 럭키는 무거운 트렁크와 접는 의자와 음식 바구니를 들고 팔에는 외투를 걸치고 있다. 포조는 채찍을 들고 있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포조가 고도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아님이 밝혀지자 둘은 실망한다. 에스트라공은 황급히 포조를 모른 척하며 자신들이 이 고장 사람이 아니라고 둘러댄다. 이에 포조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와 친해지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조 : (멈추어 서며) 그래도 인간임엔 틀림없을 것 아뇨? (안경을 쓴다.) 내 보기엔 그래. (안경을 벗는다.) 다 같은 인간이란 말이오. (그는 요란스러운 웃음을 터뜨린다.) 포조와 같은 종자라는 거지! 신의 자손이란 말이오!

포조는 같은 씨름을 하고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인간 종으로서의 연대를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는 한 동포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포조는 같은 종인 인간 럭키를 노예로 삼아 그를 개 취급하는 악랄한 주인이다. 그는 자신의 여행길에 필요한 트렁크와 외투를 포함한 짐을 전부 럭키로 하여금 짊어지게 하고 그에게 채찍질까지 하기에 이른다. 럭키는 잘 때에도 일어서서 잔다. 몸이 기울어지다가는 얼른 허리를 펴며 졸기를 반복한다. 선 채로 잠이 든 사람의 리듬을 애처롭게 보여주면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잘 때에도 짐을 내려놓지 않는 그의 목 주변에 줄의 매듭 때문에 쓸린 상처를 보고 포조가 지독하게 악랄한 인간임을 알아차린다.

블라디미르 : (고함치며) 더럽다! (단호하게 그러나 더듬거리며) …… 인간을 (럭키를 가리키며) 저런 식으로 다루다니 …… 그건……한 인간을 …… 정말 ……창피하다!
에스트라공 : (자기도 거들어야겠다는 듯) 파렴치하다!

에스트라공은 더 나아가 묻는다.

에스트라공 : 저 사람은 왜 땅바닥에 짐을 내려놓지 않죠?

포조는 이렇게 대답한다.

포조 : 왜 저놈이 제 몸을 편하게 하지 않느냐 이 말이지? 어디 그 까닭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럴 권리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러고 싶지 않은 걸까? 그게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왜 싫은 걸까? (사이) 여러분,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 
블라디미르 : 어디 좀 들어보자!
포조 : 그건 내게 감동을 주려는 거요, 버림받지 않으려고.
에스트라공 : 뭐라고요? 
포조 : 내 설명이 서툴렀던 모양이군. 저놈은 내 동정을 사려는 거라고. 내가 자기와 헤어지지 못하게 말이요.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포조와 럭키의 관계가 왜 럭키가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가에 관한 포조의 대답을 통해 드러났다. 둘의 관계는 신과 인간의 현실계와 초월계에 걸친 관계가 연장되어 현실 세계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구현된 1:1 도식이다. 포조와 럭키를 등장시킨, 그리고 둘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한 작가의 의도를 추리해 보면, 아마도 신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굴종과 정복의 관계가 인간계에서도 연장되어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을 고발하려고 한 것 같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를 타자에 대해 굴복시키는 이유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동정을 사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버림받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신은 우리의 지성과 능력과 선함을 능가하는 전지전능전선한 존재이기에 우리의 행보가 그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인 타인에게 굴복하려는 이유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우리 존재가 드러나는 데 필요한 빛을 타자가 거머쥐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는 사실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을 자신이 인지하는 그 무엇이다. 즉, 인간 존재는 타인에 대해 존재하는 대타 존재인 것이다. 타자가 없다면 자기 존재는 성립되거나 정의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에게 자주성을 일정 부분 양도함으로써 그의 시선을 빌리고 그 시선에 비추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를 테면 헤겔의 노예-주인 도식이 인간과 신 사이에 적용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간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각자는 타인에 대해 노예이자 주인이다. 우리는 타인이 스스로를 자신으로서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조건인 시선을 거머쥐고 있는 관객으로서의 주인인 한편 동시에 타인의 시선에 의해 스스로를 정립해야 하기에 타인의 권력을 인정하는 노예이기도 한 것이다.

럭키는 인식-존재 구조에서 노예의 단면을 부각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조는 럭키를 지배하면서도 그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그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주인의 입장이 동시적으로 노예의 입장을 내포하고 노예의 입장이 동시적으로 주인의 입장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럭키는 자기 존재를 정립하기 위해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여 포조의 시선에 자신을 종속시킨다. 포조가 없으면 럭키 자신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럭키가 포조에게 자신에게 관심을 달라고 종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기가 엄마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엄마로 하여금 관심을 강제하는 집안 최고 서열이듯이. 그래서 포조는 럭키 위에 군림하고 있지만 사실은 럭키가 자신의 자유 의지를 위협하고 있음 또한 절감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조는 럭키를 극심히도 혐오한다. 그는 럭키가 졸렬한 계산을 한다고 여기고 자신의 마음을 조종하려고 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스로가 보편자에서 도출된 특별한 유일자인 것 마냥 행세하며 제가 무슨 주피터의 아들 아틀라스라도 된 것처럼 군다고 그 오만을 경멸한다. 포조는 럭키의 노예 도덕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가 지적했듯이 노예들은 사실 선한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노예들은 크리스천들이다. 크리스천은 단 한 번도 타인의 유복을 기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의를 외치지만 그 정의는 사실 타인에 대한 질투심에서 비롯되어 타인의 몫을 공중분해 해버리려는 악한 의도에서 행해진 일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켜 달라고만 기도한다. 이런 면에서 사실 그들은 기복을 하는 것이지 단 한 번도 제대로 기도를 한 적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최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에게 감성팔이를 한다. 자신만은 원죄를 품은 인간 보편자에서 벗어난 특수한 유일자, 무고하고 순결한 존재이다. 그는 혹여나 착한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천국행을 위해 졸렬한 이해타산적 계산을 하고 행하는 불순한 행위이다. 이러한 노예와 크리스천의 대표 격이 럭키인 것이다. 

럭키가 불순한 인물로 비판할 점이 많기는 하지만 역시 피지배자로서 고충이 많은 존재이다. 예를 들어, 포조는 럭키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재밋거리로 보여주기 위해 생각을 해보라고 시킨다. 그러자 럭키가 방언처럼 지식 아닌 지식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럭키 : (단조로운 어조로) 프앙송과 와트만의 최근의 공동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까까 흰 수염이 달린 까까까까 인격신은 공간의 시간 밖에 존재하고 있어 하늘의 무감각과 무공포와 침묵 위 높은 곳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사랑하는데 …… 테니스 항공 구 홀짜리와 십팔 홀짜리 골프 빙상 태니스 요컨에 왜 그런지 모르지만 세느 세느에와즈 ……공기와 땅은 오호라 제7기에 혹독한 추위로 돌들의 차지가 되었고 에테르와 땅과 바다는 ……코나르!......미완성!.......

4페이지에 다다르는 럭키의 생각은 방대하지만 무익한 정보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유한 지성의 무한성에 대한 헛된 탐구를 보여준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의 신 존재 증명을 보라. 그것들은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엉뚱하기 그지없다. 무한을 이해하려는 욕망에 비해 유한 지성은 너무도 초라하고 한계가 지워져 있는 것이다. 

럭키는 포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생각이라는 것을 재롱을 떨 듯 선보였지만 포조를 이해시키지도 못할뿐더러 그의 심심함을 달래주지도 못했다. 동시에 포조가 럭키와 같은 종이라는 점에서 포조 또한 생각을 럭키의 수준 정도로 밖에 못한다는 가정을 했을 때 포조 또한 신이라는 초월자의 입장에서는 럭키와 다름없음을 보여준다. 

포조는 럭키의 재롱이 끝나자 떠나려 한다. 그런데 떠나기에 앞서 포조가 할아버지한테서 받은 '뚜껑이 이중으로 달리고 초침까지 있는 멋있는 회중시계'를 잃어버려 찾는 대목이 나온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포조와 함께 시계를 찾기 위해 째깍째깍 하는 소리가 나는지 귀 기울인다. 그런데 소리는 끝내 나지 않는다. 그러자 에스트라공과 포조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에스트라공 : 시계가 섰나 보지.
포조 : 아마 집에다 놓고 왔나 보오.

여기에서 시계의 부재는 곧 시간의 부재를 의미한다. 고도를 기다림에 있어 그 기한은 영원하다는 뜻이다. 고도는 언제 올지 모른다. 기약을 한 적이 없다. 끝이 없는 길을 걷는 인간에게 시간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는다. 실로, 이러한 막막함의 토로는 여러 군데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포조 : 고도인지…… 하여튼 그자하고 만날 약속을 했다면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보고 나서야 단념을 하든 말든 하겠소.
블라디미르 : (발을 멈추며) 밤은 영영 오지 않는 걸까?

여기에는 시간의 무궁한 연장에 지쳐 포기하고픈 체념의 냄새까지 풍긴다. 

포조는 떠난다. 그 이후에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선악과를 먹는 죄를 저질러 원죄를 안게 된 아담의 자식인 아벨이다. 그는 어린아이로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보다 순수하여 하나님의 계시에 그나마 가깝고 그러하여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소년 또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와 똑같은 유한존재이기에 고도를 기다리는 데에 있어 무한의 시간이라는 형벌을 내려받은 존재이기에 이전에 자신이 두 사람을 만나 고도의 메시지를 전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소년은 매일 두 사람에게 찾아와 고도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그러나 매일 그 만남을 망각하고 다음날 새롭게 그 둘을 마주하며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형벌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이 다가오자 에스트라공은 불쌍한 소년과 무한 루프에 갇힌 자신들의 처지를 이렇게 한탄한다. 

에스트라공 : 또 시작이로구나

소년이 고도로부터 들은 음성은 다음과 같다.

소년 : (단숨에)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 

그러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어제도 똑같은 말을 소년으로부터 전해 들었기에 내일인 오늘을 기약했고 오늘도 들었으니 내일을 또 기약해야 하고 내일도 또 들을 것이므로 내일 모래를 기약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순환고리는 끊이지 않고 영겁으로 연거푸 계속되는 것이다. 

블라디미르는 허탈하게 소년을 보내면서 희망도 없이, 고도에게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블라디미르 : 가서…… (망설인다.) 가서…… 그냥 우리를 만났다고만 하려무나. (사이) 네가 우릴 만난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소년을 보내고 다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만이 길가에 남는다. 둘은 서로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다. 이런 세월이 얼마나 반복되었을까?

에스트라공 : 우리가 이렇게 같이 붙어 있은 지가 얼마나 될까?
블라디미르 : 모르겠다. 한 오십 년?

정확한 세월도 모른다. 그러나 무한한 기다림이라는 인간 종으로서 공유하는 기다림이라는 형벌에 둘 모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그들에게서 설핏 연대의 정신이 보일락 말락 한다.

에스트라공 : 우린 서로 떨어져 있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사이) 어차피 같은 길을 걷게 돼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블라디미르 : (화도 안 내고) 그야 알 수 없지. 
에스트라공 : 그래, 알 수 없지 아무것도.
블라디미르 : 헤어지는 게 낫다고 생각되거들랑 언제라도 헤어질 수야 있지.
에스트라공 : 이젠 그럴 필요도 없다. 
침묵
블라디미르 : 하긴 그래, 이제 와서 그럴 필요는 없지. 

그러나 둘이 서로 의지할지라도 그것이 무한한 기다림의 형벌, 시간의 부재, 영원성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은 아니다. 둘은 엉거주춤 무대에 두 마리의 미어캣처럼 우뚝 서있다.

에스트라공 : 그만 갈까?
블라디미르 : 가자.
두 사람 다 움직이지는 않는다

기다림의 순간들과 자의적으로 고도가 올 것이라 예상하는 장소에 고착된 두 사람. 그들은 영원토록 그 시간과 공간을 벗어던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1막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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