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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마무라 Jan 16. 2024

고도를 기다리며 3

사뮈엘 베케트

제2막은 역시나 망각으로부터 시작한다. 에스트라공은 지금 서있는 곳에서 어제도 우둑하니 서서 고도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블라디미르는 주변을 둘러보라고, 기억을 떠올려보라고 재촉한다.

에스트라공 : (별안간 흥분해서) 몰라본다고? 뭘 몰라본단 말이야? 난 모래밭 한가운데서 거지 같은 인생을 보내왔다. 그런데 무슨 경치의 차이 같은 걸 알아보라는 거야? (주위를 둘러보며) 이 더러운 쓰리게들을 보라고. 난 여기서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어. 평생을 여기서 똥오줌 갈기고 살았다니까!

에스트라공의 말에는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인간 존재의 무력감이 짙게 묻어나 있다. 기독교적 시간관은 직선적이다. 예수를 전면에 등장시킨 신약의 두드러지는 특성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있다. 즉, 크리스천들의 시간은 구원이 미래의 특정한 시점에 예정되어 있어야만 흘러간다. 목표시점이 있어야 시간도 방향성을 갖고 거리를 좁혀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고도의 경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에게 만남에 관하여 어떠한 언질도 주지 않았다. 블라디미르는 그저 척박하기 그지없는 모래밭 한가운데서 거지 같이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에스트라공은 비참한 현실에 통탄하며 이렇게 말을 잇는다.

에스트라공 : 제일 좋은 길은 날 죽여주는 거다. 수십 억의 다른 놈들처럼.
블라디미르 : (격언조로) 인간은 저마다 작은 십자가를 지도다. (한숨짓는다.) 잠깐 사는 동안에 잠깐 동안에, 그리고 그 뒤로도 잠깐.

우리는 모두 최후의 날에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는 십자형의 예수 같은 처지인 것이다. 에스트라공은 평안을 가져다줄 죽음을 차라리 바라는 듯도 하지만 이내 삶에의 미련을 내비친다.

블라디미르 : 살았던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지?
에스트라공 : 그 얘기를 꼭 해야겠다는 거지.
블라디미르 : 죽었으면 그만일 텐데.
에스트라공 : 그걸로는 부족한 거야.

앞선 리뷰, 즉 ‘고도를 기다리며 2’에서 나는 럭키의 대사를 들면서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유한한 인식이 전지전능전선한 무한 존재인 신에 대한 인식과 지식을 얻으려 할 때 부딪히는 좌절을 보였다. 이후 2막에서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도 생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식으로의 도전 행위에 어떤 긍정적 의의가 설핏 보이는 듯도 하다.

에스트라공 : 우리 서로 반대하는 말을 하자. 
블라디미르 : 그건 안 된다. 더 이상 생각하는 위험은 막아야 하니까.
에스트라공 : 그렇다면 불평할 이유도 없지 않아?

그렇다. 생각은 신의 지성과 음성에 닿으려는 인식의 투쟁이고 도전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존재의 비참함을 무기력하게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승부에서의 기권의 표시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현생에 불평할 이유도 없어진다. 이 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에스트라공 : 이러면 어떨까? 우리가 행복한 걸로 해두면?
블라디미르 : 무서운 건, 이미 생각을 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 하지만 우리가 그랬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블라디미르 : 이 시체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에스트라공 : 이 해골들 말이지?
블라디미르 : 우리가 뭘 좀 생각한 모양이다. 시체 보관소다. 시체 보관소야.
에스트라공 : 그래도 현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 

인간은 부조리를 겪는다는 점에서 산 송장에 불과하다. 생각하는 자는 그런 자들이 북적북적한 세상을 시체 보관소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신과 씨름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무게를 견뎌내려는 사람은 현실에서 도피해서는 안 된다. 정직한 대면이야말로 투쟁의 선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면은 긴장감을 유발하고 사람의 정신력을 소모시킨다. 인간은 그래서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존재 양태로부터 시선을 돌린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도 그렇다. 현실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는 에스트라공의 결연성이 담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긴장감은 또 맥없이 풀린다.

블라디미르 : 이제부턴 다른 얘깃거리는 찾아야 할 텐데. 엊저녁에 우린 뭘 했니?
에스트라공 : 그야…… 잡담이나 했겠지. 어제저녁에 우린 구두 얘기를 했지. 그 얘기를 해온 지가 오십 년이나 된다.

그들은 고도를 향한 기약 없는, 무의미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 시종일관 실없는 심심풀이식 소리를 지껄여댄다. 자신의 초라한, 그러나 진실된 존재 양태를 두려움에 외면하고픈 인간들은 일상석의 범속함에 자신의 본래적 현존재를 은폐한다. 본래적 현존재가 드러나는 때는 인간이 어색함을 느끼는 비일상성 속에서이기 때문에 그들은 습관에 숨기를 반복한다.

한편 블라디미르는 1막에서 얻은 럭키의 모자를 쓰고서 에스트라공에게 이렇게 제안한다.

블라디미르 : 포조와 럭키 흉내를 내보면 어떨까? 내가 럭키 노릇을 할 테니 넌 포조를 해라. (짐의 무세에 눌려 허리가 꺾인 럭키의 자세를 흉내 낸다. 에스트라공,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본다.)
에스트라공 : 날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블라디미르 : 내게 욕지거
를 해봐!
에스트라공 : 더러운 놈! 거지 같은 놈!
블라디미르가 여전히 몸을 구부린 자세로 앞으로 나왔다 물러섰다 한다.
블라디미르 : 나보고 생각하라고 해!
에스트라공 : 생각해! 이 돼지 같은 놈아!
침묵
블라디미르 : 그건 못 하겠다.

블라디미르가 럭키의 모자를 썼다는 것은 럭키의 무게를 자신의 어깨로 짊어보려는 인간 종으로서의 공감과 연대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는 흉내로나마 럭키가 겪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함을 몸소 느껴보는 것이다. 그러나 럭키가 한 것과 같은 장황한 지식 나열은 포기한다. 아마도 그것의 무익함을 뼈 저리게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어서 포조와 럭키가 또 한 번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둘의 처지가 바뀌었다. 포조가 장님이 되어 럭키의 보조를 받는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포조의 시력 상실은 전에 예고되었다. 럭키에게 분노를 퍼부을 때 한편으로 언젠가 자신과 럭키의 처지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마, 인간에게 있어서 계급 구조의 취약성과 변동성을 느끼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체념조의 통달인 것이다. 

포조는 넘어져서 도움을 구한다. 그런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럭키가 달려들까봐 (1막에서, 즉 어제 에스트라공은 럭키에게 물렸다) 겁을 먹고 요청을 저버리려 한다. 그들은 마음이 안 내킨다고 무심히 자리를 뜰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처럼. 그러나 신에게서 버림받는다는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아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자신까지도 인간의 구원 요청을 유기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품는다. 그들은 결국 포조를 돕는다.

블라디미르 : 방금 들은 살려 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 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나 바에야 한 번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 보자는 거다. 

포조의 절규는 인류 동포에게 외치는 보편으로서의 구원-소망이다. 실존적 아픔에는 너나 나나 할 것이 없으므로 연대적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을 돕는 데에 있어서는 개별자가 보편자의 의무를 다하는 사명감이 필요하기도 하다.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공동체에 충실히 속해있으면서도 각자가 종족의 대표가 되어야 한다. 

포조와 럭키는 퇴장하기 전에 재밌는 인상을 남기고 간다. 

럭키가 짐을 내려놓고 끈 한쪽 끝을 포조의 손에 쥐여 준 다음 다시 짐을 든다.
블라디미르 : 그 트렁크 속엔 뭐가 들어 있소?
포조 : 모래요. 

럭키는 내내 모래를 들고 다녔다. 트렁크는 럭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포조에게도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 모래 덩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인간의 노력은 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헛수고와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더불어 인간 고통에도 의미는 없다. 이유도 모르고 고통을 겪는 게 인간 삶의 근저인 것이다. 포조는 이 음울한 깨달음을 슬픔에 열변을 토해가며 말한다.

포조 :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좀 말아야!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는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냔 말이오? (더욱 침착해지며)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독 다시 밤이 오는 거요. (그는 끈을 잡아당긴다.) 앞으로!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다. 탄생의 이면에 죽음이 도사린다. 또한 어느 날에 우리는 태어나고 어느 날에 우리는 늙고 어느 날에 우리는 병들고 어느 날에 우리는 죽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연적으로 이 세상에 던져져서 운에 따라 살아가다 어쩌다 죽는 것이다. 우리의 언행은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일회적이다. 우리는 일회용품처럼 쓰이고 버려진다. 

소설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1막에 나왔던 고도의 전령역할을 하는 소년이 다시 등장한다. 소년은 역시나 기억을 잃어버렸다. 

블라디미르 : 다시 시작이로구나. (사이. 소년에게) 너 나 모르겠니?
소년 : 모르겠어요.
블라디미르 : 너 어제도 왔지?
소년 : 아니요.
블라디미르 : 그럼 처음 오는 거냐?
소년 : 네.
침묵.

소년이 전할 고도의 메시지도 변함없다. 소년이 할 말을 블라디미르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고 있다.

블라디미르 : 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였지?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내일은 틀림없겠지?
소년 : 네.
침묵.
극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자살 시도가 엉성하게 실패하는 것을 마지막 장면으로 한다. 둘은 근처의 나무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에스트라공 : 목이나 맬까?
블라디미르 : 무얼로?
에스트라공 : 너 끈오라기도 없냐?
블라디미르 : 없다.
에스트라공 : 잠깐만. 내 허리띠가 있다.
블라디미르 : 그건 너무 짧다.
에스트라공 : 네가 내 다리를 잡아당겨 주면 되잖아.
블라디미르 : 그럼 내 다리는 누가 잡아당겨 주게?
에스트라공 : 참 그렇구나. 

죽음 또한 한 없이 가볍고 경솔하고 유치한 것이다. 웅장하고 숭고한 죽음 따위 없다. 우리의 죽음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고 아무도 우리를 기억해주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신은 필멸자의 필멸에 꿈쩍이나 할까? 그것은 우연성과 자연성이 기묘하게 혼합된 신의 세계 운영 원리가 아니었던가? 결국, 나무에 묶었던 끈이 끊어지면서 자살 기도는 실패한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내일 또 오기로 약속하면서 내일은 튼튼한 끈을 가지고 오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슬프지만 너무도 담백한 그리고 적확한 인간 심리의 적나라한 드러남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대화를 남긴다. 필멸자의 굴레와 그것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 관한 고백이자 고발이자 고해인 것이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살게 되는 거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그 진부한 말이, 이제는 정이 들어버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고도를 향한 영원한 기다림의 양상을 잘 표현하는 것 같다. 

극은 이렇게 끝난다.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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