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너무나 충격적인 상황 앞에서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꽤 오래된 일이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한때 정신적으로 몹시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상증상이 생겼고, 그걸 고치려고 지방에 있는 작고 평범한 의원을 찾아갔다.
상담을 받고 나서 좀 쉬면서 안정도 되찾고 병을 고치려고 입원 결정을 내렸다.
물론 남편도 동행했었다.
그저 평범한 곳인 줄 알고 입원을 한다고 했는데 실상은 달랐다.
남편은 가고, 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서 입원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입원실이 아니었다.
충격 그 자체였다.
난, 입원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일반주택처럼 방 몇 개에 거실이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구분이라면 남자 방, 여자 방 그렇게 구분된 공간에서 바닥에 매트리스 몇 개가 놓여있는 게
전부였다.
주위는 온통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그러한 풍경들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더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가겠다고 했으나 절대로 나갈 수 없다고 했다.
건장한 남자 직원이 지키고 있어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그렇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내가 계속 항의하자 그러면 나를 독방에 가둘 수밖에 없다고 하여 그냥 주저앉았다.
내 휴대폰은 "남편에게 주라" 고하여 가져간 상태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옷도 간단히 갈아입을 것만 소지하고 나머지는 내가 가지고 있을 수 없었다.
문도 이중으로 잠겨있고 감시를 하고 있어서 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나 스스로 나를 그곳에 가두어버렸다.
봄에 들어가서 가을까지 몇 개월을 그곳에서 꼼짝없이 갇혀 살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주일에 한 번 가족 면회는 시켜주었다.
내가 그곳에서 할 수 있었던 건, 가족이 맡겨놓은 돈에서 하루에 삼백 원을 주면 그곳에 비치된 공중전화에서
가족과 통화하는 게 전부였다.
전화 통화하다가 삼백 원을 다 쓰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루 세 번 밥 먹고, 약 먹고... 간식을 주문하면 맡겨놓은 돈으로 대신 사다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창문을 모조리 철창으로 막아 놓았고, 출입문도 이중으로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도망가려 해도 갈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다 별일 없이 잘 지내면, 건물 옥상정도 데리고 올라갔고, 그 기간이 지나면 인근에 있는 개천으로
데리고 갔었다.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었다.
데리고 외출 나갔을 때 도망가다 붙잡혀 오면 그 길로 외출 금지다.
소란을 피우면 기저귀 차고 풀어줄 때까지 독방에 갇혀 지내야 한다.
난, 점점 독한 약 기운 때문에 하루 종일 잠만 자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약 기운을 이겨보려고 밥을 많이 먹기 시작했다.
그러자 체중은 점점 늘어만 가고, 더 무기력해졌다.
평소 커피를 좋아했던 터라 커피믹스를 주문했다.
하루는 커피를 마셨더니 정신이 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루에 6~7잔을 마셨다.
밥과 커피로 약 기운을 이겨내고 버텼다.
약을 먹을 때도 모두 한 줄로 줄을 서서 직원이 보는 앞에서 약을 받아먹고, 입을 벌려 확인을 받아야만 했다.
어느 순간부터 주위 사람들이 나를 따라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커피도 제한적으로 소량만 살 수 있었다.
매일매일 원장님이 회진을 돌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체크를 하고 다녔고, 쉽사리 내보내
주거나 퇴원을 시켜주지는 않았다.
갖은 이유를 대면서.
내게도 이런저런 질문 세례를 해왔다.
퇴원하겠다는 내 말에 원장님은 번번이 노를 외쳤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남편과 딸이 주말마다 면회를 와 주었다.
남편과 딸은 조금만 참아보라 했다.
그곳에서 몇 년을 갇혀 사는 아가씨도 있었다.
면회 오는 사람도 하나 없이... 아무도 찾아와 주는 이가 없으면 나갈 수도 없었다.
물론 병원비는 그 아가씨 경우엔 국비 지원이라 했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갇혀 살면서, 난 점점 말하는 것도 어눌해졌다.
약이 너무 세서 그런 후유증이 생겼다.
발음이 어눌해지는 것은 물론 침이 나도 모르게 질질 흐르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서 이렇게 갇혀 있나'라고 한탄을 하고 답답해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곰곰이 생각했다.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매일 궁리를 했다.
그곳에서 IQ 검사를 했는데 가족들에게는 내 IQ가 엄청 좋다고... 그래서 머리가 좋다고 했었다는 소리를
나중에야 들었다.
심하게 소란을 피우면, 독방에다 경우에 따라 손, 발을 묶어 놓기도 했었다.
누운 채로 기저귀 차고 풀어 줄 때까지...
난, 그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는 체중이 항상 54kg 정도로 유지해 왔었는데, 그곳에 입원하고는 70kg 가까이 체중이 늘었고, 퇴원 후에는 97kg까지 찌기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다이어트를 계속하고 있다.
물론 실패하고 또 시작하기를 반복한다.
그곳에 있으면서 내 머리가 정지해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을 하다 그 생각이 어느 정도 도달하면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라고나 할까?
나는 가족들에게도 내가 거기서 나올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나 아이들이 병을 못 고칠까 봐 걱정을 하는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몇 개월을 갇혀 있다가 어느 날 1박 2일로 집에 외박을 나올 수 있게 되었고, 나의 끈질긴 집념으로
인해 추석 전에 퇴원할 수 있었다.
내가 집에 갈 수 있는,
퇴원할 수 있는,
정답을 말했으므로.
철저히 고립되어 갇혀 살 수밖에 없었던 나!
나 스스로 그곳에 나를 가뒀던 나!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정말 슬프다.
가까운 내 친구도 나를 보며 바보가 되어 버렸다고 할 만큼 변해버렸다.
내 친구가 한참 뒤에야 그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그땐 정말 속상했었다고"
내가 퇴원하고 얼마 안 돼서 멀리 외국에서 나를 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와준 친구.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난 그 후,
그곳에서 서울로 다시 이사를 왔고, 가까운 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있다.
물론 아무 이상은 없다.
있었던 증상도 없어졌지만 의사 선생님 조언에 따라 "예방 차원에서 그냥 가볍게 먹으면 좋겠다." 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해서다.
그때 그 후유증으로 가끔은 발음이 잘 안 되는 듯한, 어눌함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큰 불편은 없다.
단지 그때 이후로 체중 조절이 쉽지 않아서 다이어트를 계속해야 하는 불편함은 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감사하다.
그곳에 살 때, 남편은 하루 출퇴근 시간만 5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를 매일 오가면서, 주말에 쉬지 않고
나를 면회와 주었다.
딸은 집안 살림하고 나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매번 해다 주었다.
내가 그런 일들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버팀목이 되어준 가족이 있음에 힘을 낼 수 있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어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거나, 혹여 더 심한 경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잘 극복하시길
바란다.
물론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혹시 있다면,
힘을 내서 꼭 이겨내시라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러한 마음에서 용기를 내어보았다.
이 글을 쓰기 전엔 많은 생각을 했었다.
많이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세세하게 모든 걸 다 담을 수는 없기에 이 정도만 얘기할까 한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데다가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되돌아보게 되기에...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내가 아직도 그곳에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 나 스스로 나를 가두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길 바란다.
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고치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음으로.